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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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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기미 / 공선옥  
시대의 기미

공선옥  소설가


그림 : 프리다 칼로


그럼에도 아랑곳없이 세상은 조금씩 변해왔다는 것을, 느낀다. ‘차마 그 이름을, 그 얼굴을 밝히지 못하는 피해자’들의 시대는 이제 먼 과거의 일이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시대는 다시는 올 수가 없게 되었기를 나는 바란다. 뭔가 오고 있다. 지금, 그 기미를 나는 알겠다.

최근의 뉴스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뭔가, 뭔가가 달라지고 있는 것을 알겠다. 나는 알겠는데, 그들은 몰라서 아마 그렇겠지. 멀쩡하게 생긴 음식점 옆자리의 두 아저씨가, 남녀가 좀 화기애애하면 뭐가 덧나나? 낭만의 시대는 갔네, 갔어, 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을 보면. 1986년이었으니 30년도 넘은, 그러나 아직도 어제 일인 듯 생생한 그 일이 떠오른다. 그 일의 당사자는 최근 법무부 성희롱 성범죄 대책위 위원장 일을 맡은 권인숙씨다. 돌아가신 조영래 변호사가 작성했다는 변론의 한 구절이 지금도 가슴을 애리게 한다.

“권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될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을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유명인사, 얼굴 없는 이 처녀는 누구인가….” 그 ‘권양’이 부천서에서 입에 올리기도 끔찍한 고문을 받았을 때 이 나라 언론들은 성폭행 주장은 의식화 투쟁이라고 썼고 그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성고문은 없었으며 운동권인 권양이 성을 투쟁 도구화했다고 주장했다. 누군가는 그 사건에 대해서 또 이렇게 쓰기도 했다. “여자로서 차마 밝힐 수 없었던 일을 용기 있게 드러낸 권인숙을 위해서도, 부도덕한 군사정권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서도 조영래는 이 사건을 이겨야 했다”고.

사건이 일어난 지 2년이 지나서야 ‘권양’을 고문했던 경찰관은 구속되었고 바로 그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더불어 87년 6월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기억한다. 권인숙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파서 차마 그 이름을 부를 수 없었고 그녀와 무관한 사람들이라 해도 이 ‘처녀’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것이 그녀에 대한 당연한 ‘예의’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그때 분명히 있었다. 왜냐면, 아주 옛날 사람들 표현으로 하자면, ‘처녀 앞날을 생각해서’ 말이다. 조영래 변호사는 “이 사건을 그대로 두고서는 실로 인간의 존엄성이니 양심이니 인권이니 법질서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들은 입에 올리기조차 낯 뜨겁다”고 했다. 권인숙을 고문하던 경찰관이 구속되고 6월항쟁을 거쳐서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고 직선으로 뽑힌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쫓겨나는 일이 일어나는 동안 우리는 이제 진정, 인간의 존엄성을, 양심을, 인권을, 민주주의를 입에 올려도 낯 뜨겁지 않은 사회를 만들었는가, 라는 물음에 어떤 망설임도 없이 고개 끄덕일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아랑곳없이 세상은 조금씩 변해왔다는 것을, 느낀다. ‘차마 그 이름을, 그 얼굴을 밝히지 못하는 피해자’들의 시대는 이제 먼 과거의 일이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시대는 다시는 올 수가 없게 되었기를 나는 바란다. 그것이 무엇이든,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이 그 이름을, 그 얼굴을 당당히 드러내고 발언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가 되기를.
그러나 그런가? 낭만의 시대는 갔다고 투덜거리는 두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나, 뭔가 오고 있다. 지금, 그 기미를 나는 알겠다. 최근에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 신지예씨에 관한 기사를 보고도 뭔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꼴페미, 나이도 어린 애송이, 운전도 못하는 여자가 정치를 말하느냐’는 대거리에 바로 그런 대거리 때문에라도 젊은 여성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스물여덟 젊은이의 풋풋한 당당함이 세상은 변하고 있고 그리고 변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그러나 또 세상이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고색창연하게(실로 낯 뜨겁게, 그러나 필시는 낯 뜨거운 줄 모르고) 보여주는 풍경도 있다.

최근 우연히 어떤 여성 정치인의 출판기념회 자리에서 들은, 여성 정치인의 자리와 남성 정치인의 자리가 어떻게 다른가에 관한 이야기가 그렇다. 남성 정치인의 출마 자리에는 그 익숙한 ‘학연, 지연, 혈연, 조직’으로 연결된 남성들이 거의 ‘투자자들’처럼 몰려드는데 여성 정치인의 자리에는 그 흔한 동문도, 고향 선후배도, 문중 사람들도 무관심하고 조직도 없다는 것이다. 이제 제발, 동문회, 고향 선후배, 문중 사람들, 그리고 조직 사람들이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길 바란다. 그 이름과 얼굴을 당당히 드러내는 서지현들이, 꼴페미, 애송이, 운전도 못하는 신지예들이 차마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야 했던 권양들의 시대를 지금 포맷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이제사 이렇게 오고 있다. 낭만 운운하며 투덜거리고 있을 때가 아닌 것이다.

* 한겨레, 20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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