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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1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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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지구를 지키는 일, 권력이 채운 족쇄를 부수는 일 / 조천호  
파란 지구를 지키는 일, 권력이 채운 족쇄를 부수는 일

조천호 경희사이버대 기후변화 특임교수

민주주의가 기후위기 막는다


우리 세상은 미리 주어진 조건이 아니며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과제다
미래는 불타고 위험해 보인다고 해도 아직 그 재앙을 극복할 수 있다
더 나은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곧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것이다


기후위기는 비단 자연의 문제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사회가 변하면서 기후가 변했고, 이제 기후변화가 사회변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요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정치적 힘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기후위기로 변화될 세상은 민주적일까? 아니면 권위적일까?

배출된 온실가스가 대기 중에 축적돼가는 동안 이 세상은 부를 창출해왔다. 그래서 지난 30년 동안 기후위기 경고가 있었지만 온실가스 배출은 오히려 늘려왔다. 산업혁명 이전보다 지구 평균 기온이 1도 상승했으며, 여기에 더욱더 가속하여 이번 세기 중반에 기온이 1도 더 상승할 수도 있다. 우리 문명이 이 정도의 지구 가열을 감당할 수 있을까? 완벽한 답은 모르지만, 인류가 제어할 수 없는 파괴적인 위험은 점진적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대규모 비선형적인 기후 사건들이 대규모 비선형적인 정치·사회 사건들을 일으킨다. 기후위기로 일어난 물 부족, 식량 부족, 생태 파괴, 해안 침수, 전염병 유행 등이 난민 발생, 인종청소, 국경 분쟁, 물 전쟁 등 정치·사회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미 2003년 수단 다르푸르에서 일어난 인종청소는 물 부족으로 거주지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아랍계 유목민과 자신의 거주지에 들어오는 이들을 막으려는 아프리카계 농부 간의 충돌로 일어났다. 2010년 러시아 가뭄으로 식량 가격이 폭등하면서 아랍 국가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결국 시리아 내전으로 치달았다. 이때 발생한 난민이 유럽 문제가 되었고 그 난민을 막겠다는 영국 브렉시트에서 보듯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2019년 네이처 기사에 따르면 앞으로 기아에 시달릴 사람은 기온이 1.5도 상승할 때 3500만명, 2도 상승할 때 3억6200만명에 달하며 거주지를 떠나야 할 사람은 1.5도 상승 때 9100만명, 2도 상승 때 6억8000만명에 이른다. 난민 이주는 기후위기에 적응하는 방법 중 하나이므로 이 흐름이 앞으로 크게 증가할 수 있다. 이 정도 기후위기가 일어나면 다르푸르 인종 학살과 시리아 난민과는 그 규모와 강도가 전혀 다른 사회 혼란이 극에 달할 것이다.

전 세계가 항시적으로 위험에 빠지는 기온 상승 1.5도를 막으려면 탄소 배출을 매년 전년 대비 15%씩 줄여야 한다. 우리나라가 1998년 외환위기로 고통을 받을 당시 산업이 위축돼 탄소 배출이 14% 줄었다. 전 시민이 금 모으기 등 전시상황에 준하는 총력을 다해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국과 호주의 안보 전략가들은 기후위기를 안보위기로 본다. 탄소 배출을 줄이려면 평화 시기에는 전례가 없는 규모로 노동과 자원을 전 사회적으로 재배치하고 사회를 안정시킬 리더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기후위기를 수습할 수 없으면 절망으로 빠져드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혼란에 휘말리게 된다. 인간은 불안정한 상황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며 위기 상황에서는 용기보다 두려움에 삶을 맡기기도 한다. 그러니 권력이 강제하는 질서에 복종하는 것이 불안정보다 괜찮다고 여길 수도 있다. 진짜 위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기후위기에서는 부족한 식량, 물과 자원을 강제적으로 분배하고 사회 혼란을 강제적으로 억압하는 권위주의 정부가 들어설 위험이 커진다. 민주 과정을 중단할 수 있는 독재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사회 혼란기에 등장한 히틀러는 총칼로 권력을 잡지 않았다. 독일 시민이 민주적 투표를 통해 히틀러의 독재를 선택했다.

혼란 속에서 안전한 사회를 약속하는 정치적 선동은 결국 ‘안전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한 배타적 거부를 통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불안정한 사회는 없어져야 한다고 여길 수 있는 희생양과 적을 찾게 된다. 증오, 분리, 차별의 파시즘으로 내달리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집단적 증오와 차별은 내부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했다. 내부의 넘치는 증오를 밖으로 투사하여 국경, 종교, 인종 등 온갖 갈등이 불거져 국가 간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지금 여러 나라에서 기후위기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 이를 해결하려는 녹색당이 전진하고 있다. 한편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에 기반을 둔 극우정치 집단도 함께 부상하고 있다. 극우정치 집단은 고립주의적이어서 기후위기를 극복하려는 국제적 연대와 협력에서 빠지려 한다. 이는 전 세계 식량 공급의 안정적 지속, 난민의 인도적 관리와 온실가스 저감을 할 수 없게 한다. 글로벌 생태발자국 네트워크(GFN)는 2018년 기준으로 우리나라가 수출입 없이 현재의 생산과 폐기에 들여야 하는 비용을 토지면적으로 환산하면 남한 면적의 8.5배가 필요하다고 발표했다. 세계 평균은 지구의 1.7배 면적이 필요하므로 이미 현재과 같은 생산과 폐기는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식량과 에너지의 세계적 협력체계가 붕괴되면 우리나라가 치명적으로 취약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사는 이 행성이 파멸을 향해 치닫고 있는 공포 상황이다. 나오미 클라인은 책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에서 공포감이 위기 상황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공포감은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공포감에 휩싸이면 달아날 힘이 생기고 높은 곳으로 뛰어오를 힘이 생기며, 때로는 초인적인 힘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어디로 달려갈지 목표를 정하는 것이다. 목표가 없으면 공포감에 휩싸여도 우리는 옴짝달싹조차 하지 못한다.
정부 간 기후변화 협의체(IPCC)는 21세기 말에 지구 평균 기온이 2~5도 상승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 전망 범위는 과학자가 온실가스 배출량에 따라 기온이 얼마나 오를지 몰라서가 아니다. 앞으로 인간이 얼마나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할지가 불확실하기에 배출량 시나리오별로 미래 기후를 전망했기 때문이다. 결국 기후위기 대응은 과학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선택 문제다.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가장 위대한 것은 아니다. 그 자유를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가 가장 위대한 것이다.

우리가 기후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권력 주체들이 쳐놓은 족쇄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이 족쇄를 부술 힘을 가지려면 우선 이 족쇄의 정체를 정확히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기후위기 대응은 싸워 이겨야 하는 정치 영역에 있다. 기존 정치체계가 짜놓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정치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기존 정치체계는 경제성장을 통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 행복해진다고 주장한다. 실업이나 빈곤, 심지어 환경 등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경제성장을 해야 한다고 한다. 지구가 몸부림치면서 거듭된 자연재해로 신호를 보내는 와중에도 무한 성장만을 추구한다. 하지만 과잉 소비사회에서 경제성장은 사람들이 ‘결핍’으로 불만스러울 때만 지속될 수 있다. 불행이 성장을 유지시키므로 성장은 더 이상 행복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기후위기는 ‘결핍’이 아니라 ‘과잉’ 때문에 일어난다. 쌓이는 쓰레기 더미를 보면서 세상 문제가 성장을 하지 못해 일어난 ‘결핍’ 때문이라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는가?

우리가 직면한 기후위기는 자연 흐름을 넘어서서 이루어지는 생산과 소비가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 성장이 돼도 빈부격차의 심화와 부의 세습으로 우리 대부분은 언제나 ‘결핍’ 상태다. ‘결핍’은 우리 사회가 아끼고 나누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가 사회를 이뤄 함께 사는 이유는 돈으로 사람의 값어치를 정하고 치열한 경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행복하기 위해, 협력하고 연대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다.

인류가 공유해야 하는 지구 환경과 자원도 성장을 위한 착취 대상이 되었다. 생산된 식량의 3분의 1은 쓰레기로 버려진다. 10억명의 사람은 배고픔에 시달리는데 15억명의 사람은 비만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래도 고기를 얻으려고 생태계를 불태워 농장을 확장한다.

식량 소비를 줄이고 건강과 먹거리 자급률을 높이는 제철 지역 음식은 풀뿌리 민주주의에서 유리하다. 몇 억년에 걸쳐 만들어진 ‘매장된 햇빛’인 화석연료를 단 몇 백년 만에 고갈시켜 온실가스로 지구를 가득 채우고 있다. 재생에너지 전환은 중앙 집중이 아니라 분산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에너지 전환은 기후위기 대응일 뿐만 아니라 풀뿌리 민주주의의 확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화력발전과 핵발전은 부가 집중된 곳에서 멀리 벗어나 운영되어 그곳에 오염을 일으키고 위험을 축적시킨다. 그곳에서 생산된 에너지 대부분은 부가 집중된 곳으로 공급된다. 이것을 당연하다고 하면 우리 사회는 너무나 비참하다. 공동체 안에서 어딘가는 혜택을 주고 어딘가는 파괴를 하는 에너지로부터 벗어나려 애써야 정상 아닌가?

화석연료를 태우는 화력발전이나 위험한 물질을 쌓아두는 핵발전이 아니라 햇빛과 바람의 에너지로 전환해야만 한다. 유럽 각국이 이미 달성하고 있는 이 일을 우리가 왜 못하겠는가? 할 수 없다는 핑계를 찾을 때가 아니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때다. 우리 민주주의는 정의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는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기후위기보다 인류에게 더 제한을 가하는 지배적인 조건은 없기 때문이다. 저렴하게 만들어 놓은 지구 환경, 자원과 노동에서나 제대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착취는 온실가스, 오염먼지와 쓰레기로 가득 찬 세상에서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 뒤틀리고 짓밟힌 우리 공동체를 치유할 수 있는 계기가 있다면 그것은 기후위기다. 기후위기가 영향을 미치는 대기, 물, 생태는 모든 사람이 그것에 대한 권리를 가진 공공재이며 현재와 미래 모든 사람의 공유재다. 이것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내야 지켜낼 수 있다.

인류 역사는 모두가 같은 위기에 처했다고, 모두의 바람에 따라 위기를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알려준다. 모두의 바람을 모아 집단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정치를 통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공포에 사로잡힌 미래와 희망으로 가고자 하는 미래 사이에 정치가 놓여 있다. 정치를 통해 희망을 연결시켜야 한다. 이는 함께 공유하는 기후위기의 인식으로부터 함께 참여하는 민주적 논의와 합의, 그리고 그것을 제도화하고 집행하는 길 위에 세워질 것이다.

우리 세상은 미리 주어진 조건이 아니며,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과제다. 미래는 불타고 위험해 보인다고 해도 아직 그 재앙을 극복할 수 있다. 우리 공동체를 바르게 바꾸고자 하는 의지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풀뿌리 연대가 이것을 해낼 수 있다. 더 나은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곧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것이다.

* 경향신문, 20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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