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뒷마당 사금파리 :::

이름: 연구소
2020/1/6(월)
조회: 1
[다른 삶]고장난 전자제품 버리면 ‘쓰레기 섬’ 돼…부품 찾기 힘들어도 고쳐 써  
[다른 삶]고장난 전자제품 버리면 ‘쓰레기 섬’ 돼…부품 찾기 힘들어도 고쳐 써

이숙명의 ‘유유자적’



누사프니다에선 물건이 고장 나면 ‘새로 산다’가 아니라 ‘고친다’라는 게 자연스럽다. 이웃이 유럽 다녀오는 김에 부품을 사 와서 고장 난 내 노트북을 직접 고쳐주었다. 필자 제공


6년째 사용한 노트북 배터리가 고장이 났다. 새 노트북 가격을 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이나 북미, 유럽보다 신제품 출시가 한 시즌 늦다. 그나마 구형 모델도 다른 국가에 갓 나온 신형의 1.2~1.5배 가격이다. 동남아라면 물가가 싸서 이민 가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렇게 한국보다 비싼 비용을 치러야 하는 부분이 분명 있다. 누사프니다는 습기, 염분이 많아서 전자제품 수명이 짧다. 비슷한 시기에 그렇게 고장 난 노트북이 마을에 여러 대였다. 그렇다고 근처에 정식 수리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남자친구 H는 발리의 사설 수리점에 배터리를 갈아달라고 노트북을 보냈다가 사기를 당해서 돌려받지 못했다. 전원과 트랙패드를 고쳐달라고 보낸 그의 노트북은 멀쩡하던 로직보드가 파손되어 돌아왔다. 상황이 이러니까 고칠 수 있는 건 직접 고쳐 쓰는 편이 이롭다. 다행히 그 무렵 유럽에 다녀온 이웃이 비품 배터리를 종류대로 구해 와서 내 노트북을 포함해 마을 컴퓨터 여러 대를 살려냈다.
물건을 고칠 수 있는 데까지 고쳐 쓴다는 건 요즘 도시에선 갖기 힘든 사고방식이다. 세상에는 궁금한 ‘신상’이 널려 있고, 그 ‘신상’ 덕분에 한두 시즌이 지난 중고는 헐값에 살 수 있다. 얼리 어답터들이 테스트만 해보고 내놓는 저렴한 ‘신동품’도 많다. 항상 새 물건을 곁눈질하느라 소유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공간 대비 많은 물건을 가지기 때문에 웬만한 소형 가전이나 가구쯤은 주변에 소문만 내도 거저 구할 수 있다. 조금만 유행이 지나면 거저 받아줄 곳 찾는 게 오히려 일이다. 가진 것이 많으니 저마다의 물건을 충분히 활용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여기선 다르다. ‘신상’에 열을 올릴 이유도 없고 여건도 안된다. 나는 목이 부러져서 회전이 안되는 선풍기를 몇 달째 쓰고 있다. 버려봤자 비슷하거나 더 못한 품질의 선풍기밖에 살 수가 없어서다. 6년을 사용한 나의 노트북도 여기선 비교적 ‘최신’이고 ‘고급’에 속한다. 적은 물건을 자주 쓰니까 각각에 대한 애착도 커진다. 단지 비용뿐 아니라 이런 심리적 요인도 작용해서, 누사프니다에선 물건이 고장 나면 ‘새로 산다’가 아니라 ‘고친다’라는 게 자연스럽고 타당한 최우선 선택지로 떠오른다. 하지만 알다시피, 전자제품이 고장 났는데 내 노트북처럼 수리가 가능한 경우는 드물다. 요즘 전자제품은 애초에 수리해가며 대대손손 쓰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누사프니다 같은 곳에서는 상황이 더 어렵다. H는 요즘 그 때문에 화가 많이 나 있다.

나는 지난달 한국을 다녀왔다. H는 기대에 차서 여러 가지를 부탁했다. 고장난 삼성 휴대폰을 수리해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H는 1970년대 후반 태어난 유럽 서민 출신에다, 동남아에 오기 전에는 컴퓨터 계통 엔지니어로 일했다. 고치면 고쳐지는 아날로그 기계 시대의 사람이다. 한 번 산 물건은 평생 써야 한다는 근검절약 정신이 몸에 뱄거니와, 웬만한 건 직접 고칠 재주도 있다는 뜻이다. 혼자선 채식을 해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마지못한 척 육식을 하는 나와 달리 H는 굶을지언정 동물은 안 먹는 고집 센 환경주의자기도 하다. 그에겐 스크린이 망가진 삼성 휴대폰 두 대가 있다. 아픈 갤럭시를 제 고향 대한민국에 보내면 간단히 소생되어 올 거라는 그의 기대는 그러나 허무하게 빗나갔다. 출시된 지 2~3년 지난 모델은 수리비가 중고 공기계 가격보다 비쌌다. 부품만 따로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H는 분통을 터뜨렸다.

“나는 나의 갤럭시 S7과 노트FE를 정말 좋아한단 말이야! 아직도 멀쩡해. 스크린만 고치면 된다고. 내가 20년 전에 쓰던 데스크톱보다도 이 작은 기계들이 더 성능이 강력해. 여기는 어차피 인터넷이 느려서 이 기능도 다 활용을 못할 정도니까 최신 모델은 필요가 없어. 우리 이웃 마데는 아직 피처폰을 쓴다고. 왜 이 기계들을 고쳐서 쓰게 해주지 않는 거야? 구형 모델의 부품을 계속 생산하거나 폐기물에서 재활용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누사프니다 습기·염분 많은 탓
노트북 등 수명 짧고 수리 불편
새로 사면 한국보다 가격 비싸
이웃 도움으로 직접 수리해
부품은 한국 중고 장터 등 기웃
배송 난관으로 장기 프로젝트
“부품 올 때까지 용접 배우겠다”
엔지니어 출신 남친 오기에 박수


나는 ‘철 지난 모델의 부품 생산 라인을 모두 유지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일제히 폰을 업그레이드하도록 하는 편이 회사 입장에서는 쉽긴 할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괜히 열 받은 H를 약 올리는 꼴이 될까봐 말을 삼켰다.

H의 또 다른 부탁은 사설 수리점에 보냈다가 파손되어 돌아온 맥북의 로직보드를 구해보란 거였다. 한국은 중국과 가깝고 배송 시스템이 잘 연결되어 있으니까 뭐든 구하기 쉬울 거야, 한국 사람들은 기계를 자주 바꾸고 중고거래도 많이 하니까… 이런 기대가 작용한 탓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부품 가격이 완제품 중고 가격과 맞먹었다. 고장난 제품을 수리해서 쓸 이유가 없는 거다. H는 또다시 분노와 좌절에 휩싸여 압도적인 기술 혁신도 없이 시즌마다 모델을 교체하고 구형 모델 가격을 올리고 부품을 단종시키는 방식으로 무한 소비를 촉진하는 현대 IT, 전자 기업들의 횡포를 열렬히 규탄했다. 단지 소비자의 지갑뿐 아니라 환경을 위협하는 이런 몹쓸 짓을 용납해선 안된다, 왜 기술이 인간을 구원하는 대신 죽이는 데 쓰이는가, 왜 기업들이 사업 모델을 바꾸지 않느냐 등등. 참으로 혼자 듣기 아까운 연설이었다. 지구보다 H가 먼저 분노와 좌절로 폭발할 참이었고, 나는 그 둘을 모두 구하기 위해 조금 더 힘을 내보기로 했다.



아날로그 기계 시대 사람이자, 환경주의자인 나의 남자친구에게 ‘용접’ 기술을 전파한 오토바이 수리기사.


나는 누사프니다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한국의 인터넷 중고 장터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마침내 H가 원하는 부품이 살아있는 고장난 노트북을 발견했을 때, H는 나를 구세주처럼 바라보았다. 시간 쓴 보람이 있었다. 가격도 부품만 따로 사는 것보다 훨씬 저렴했다. 일단 그걸 구입해서 인도네시아로 배송을 받은 다음 H가 직접 수리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배터리가 포함된 제품이기 때문에 일반 우체국 해외택배로는 안되고 EMS 프리미엄이라는 걸 이용해야 하는데, EMS 프리미엄은 가격이 비싸고, 망가진 제품은 보낼 수가 없다고. 내가 구해놓은 부품용 노트북은 속은 멀쩡할지 몰라도 외관은 너덜너덜한 물건이었으므로 통과가 될 리 없었다. 다음 단계는 한국에서 오는 손님이 있거나, 내가 한국에 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모두 기약이 없는 일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H가 다시 실의에 빠질 줄 알았다. 하지만 H의 분노와 좌절은 어느새 오기로 바뀌어 있었다. “괜찮아, 기다릴 수 있어. 이젠 그런 생각이 들어. 다소 시간이 걸릴지라도 내 이것들을 반드시 고쳐내고 말겠다….” 그는 거대한 악에 저항하는 결연한 투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나는, 하기야 오기야말로 합리와 이성을 뛰어넘는 강력한 투쟁의 동인이 아니겠는가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여 그를 응원했다. 게다가 노트북이든 휴대폰이든 부품 구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고쳐놓기만 하면 발리에선 중고값을 톡톡히 받을 수 있는 기종들이다. 그리하여 H의 고장 난 전자제품을 고치는 게 국경을 오가는 중장기 프로젝트로 발전한 상황이다.

부품들이 손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H는 취미 삼아 용접을 배우면서 시시각각 치솟는 무한소비 사회를 향한 분노를 달래고 있다. 그가 용접기를 사고 싶다고 말했을 때 나는 ‘덕 중의 덕은 양덕이라더니 역시…’라고 생각했다. 소위 ‘덕후’라 불리는, 한 가지 하위문화에 심취해서 물건을 수집하거나 관련 창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차고 딸린 넓은 주택에 사는 서양인들은 취미 활동도 스케일이 다르다는 거다. 환경을 위해서는 새 상품을 안 사야 하고, 새 상품을 덜 사기 위해서는 리사이클이나 업사이클이 필수고, 여긴 기술자가 부족한 곳이니 내가 직접 관련 기술을 배우겠다, 라는 판단을 한 H는 그날로 다이빙센터 한 구석에 작업장을 만들었다. 역시 사람이 큰일을 하려면 여유 공간이 좀 있어야 한다. 요즘 나는 건강을 위해 매일 한 시간씩 산책을 하는데 그때마다 버려진 고철을 주워서 H에게 갖다 준다. 엿 바꿔 먹으려고 고철 줍는 건 코흘리개 때 은퇴한 일인데 사십대가 되어서 다시 이러고 있다니 믿기지 않는다. H는 그걸로 내게 “어머니날(Mother’s Day) 선물 같은 조명”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애가 만들어주니까 고마운 척은 하지만 못생기고 어설퍼서 집에 두기 싫은 물건이라니, 조카 둘이 어린이집 다니던 시절의 언니네 집이 생각나면서 좀 머리가 아파왔지만, 무릇 취미만큼 인생을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없으니 아무려나 좋다고 나는 또 H를 응원했다.

도시에서의 삶은 어찌 보면 동화 같다. 우리가 내다버린 쓰레기가 우리를 눈에 띄게 위협하지 않는 곳으로 마법처럼 사라진다. 모두가 잠든 사이 거리 곳곳을 청소하고 비둘기 사체와 쓰레기를 호박마차에 싣고는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요정들이 존재한다. 사라진 물건이 어디로 가는지, 그 최후가 어떤 모습일지 우리는 모른다. 쓰던 물건을 재활용함에만 처박아 넣으면 자원을 낭비했다는 죄책감도 사라진다. 설령 당신이 이 모든 과정에 관심이 있다 해도, 기업들이 당신을 착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자그마한 섬에서는 한 번 내 손에 들어온 물건은 내 손에서 최후를 맞는 게 보통이다. 우리가 이 섬에서 버린 쓰레기는 언제까지고 섬 안에 남는다. 물건 하나하나에 애착을 갖고 교체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마법도 없고 기업도 없는 섬에서, 우리는 물건의 진짜 가치와 수명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필자 이숙명  
영화잡지 ‘프리미어’, 패션지 ‘엘르’ ‘싱글즈’ 등에서 일했다. 27년차 프로 독거인으로서 <혼자서 완전하게>라는 책을 썼으며, 2017년 한국을 떠나며 짐정리를 하느라 고군분투한 얘기를 <사물의 중력>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현재 발리 인근 누사프니다에 살면서 가끔 글을 쓰고 요가와 스쿠버다이빙을 한다.

* 경향신문, 20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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