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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2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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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무죄’의 세 가지 위력 / 정희진  
‘안희정 무죄’의 세 가지 위력

정희진 | 여성학자


지난 14일,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행사에 참석했다. 천안 국립 망향의동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안희정 무죄” 소식을 들었다. 예상하지 못했고 동승한 여성들도 술렁거렸다. 이번 재판은 대단히 중요하다. 유력 인사의 사건이어서가 아니라 권력형 성폭력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에 대한 한국 사회의 ‘대답’이기도 하고, 김지은씨가 많은 여성들에게 용기를 주었기 때문에 다른 미투 사건의 피해자들에게도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재판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위력(威力)에 대한 인식이다. 재판부는 피해 여성이 경험한 위력의 정도가 의사 표현을 불가능하게 할 상황은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여성을 포함해 많은 이들도 “피해자가 성인이고, 가해자 행동에 대해 자기주장을 할 시간이 충분했는데 왜 그런 관계를 ‘유지’했는지” 의문을 갖는다.
이번 사건은 노동시장, 그것도 선거캠프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일어난 여성 노동 이슈다. 가해자는 공적 영역의 노동 문제를 사적인 관계로 둔갑시켰다. 수행비서의 노동은 지사의 모든 공적, 사적 일정을 파악하고 매사에 즉각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24시간 대기와 노동 상태’였다. 지사 개인의 하루가 곧 비서의 업무시간이었다. 모든 연락 사안에 대한 응대부터 담배, 맥주 심부름은 물론 가장 중요하게는 가해자를 위한 감정노동까지 그녀에게는 업무였다.
다시 말해, 남성이라면 하지 않았을 일을 여성은 해야 했다. 가해자는 부하 직원을 녹초가 되도록 부려 먹으면서, 노동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를 ‘사랑(불륜)’이라고 주장했다. 피고용인에 대한 폭력을 ‘남녀관계’로 만드는 것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유용한 방식이다. 아무리 선거캠프라고 하지만 고용계약, 초과 착취, 불법 노동 문제를 왜 ‘연애’ 담론으로 연결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다.
재판부는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정언을 만인에게 적절하게 적용하지 못했다. 위력의 원리와 조건은 천차만별이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영역에서 어떤 상호 작용을 통해 작동하는지 모른다면, 위력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재판부는 위력의 의미를 좁게 해석했다기보다 무지했다. 위력은 발생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인지 불가능한 권력이기 때문이다.
위력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재판부도 가해자도 보통 시민들도, 상황에 따라 위력의 위협에 노출된다. 피해자의 대응은 당사자의 캐릭터, 젠더, 계급, 나이 등에 따라 다르다. 이번 사건에서 위계의 내용은 전적으로 가해자에게 유리했다.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의 상해가 동반되는 성폭력도 있지만, 이번 사건처럼 실제로는 위력이나 가해자가 자신을 ‘고용인’이 아니라 ‘남성’이라고 주장하는 권력형 성폭력은 폭력이 아니라 성(性)이라는 통념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를 뜻하는 젠더는 친밀성부터 폭력, 살인, 착취까지 극단의 양상을 동시에 띤다. 젠더처럼 일상의 정치는 없다. 그래서 젠더에 대한 인식이 낮은 사회는 성폭력을 지지, 방관할 수밖에 없고 특히 피해자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가정폭력을 연구할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왜 매 맞는 여성은 탈출하지 못하는가” “왜 때린 남편에게 북엇국을 끓여주는가” “왜 남편을 불쌍히 생각하는가”였다. 나는 “안기부에서 고문당하는 사람은 왜 탈출하지 못하나요, 혹시 폭력을 즐기는 건 아닌가요?”라고 되묻거나 “폭력 피해 여성이 남편에게 ‘잘해’ 주는 이유는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라 말했다.
여성은 자신에게 불리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적응과 저항이라는 이중 행동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인간은 합리적이고 일관된 존재이며 자유 의지를 가졌다는 근대 형법의 전제는 의심받고 있다. 그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폭력뿐 아니라 인간의 어떤 행동도 명확하게 ‘예’ ‘아니요’로 설명할 수 없다.
내가 혹은 다른 여성이 이번 사건의 피해자와 같은 노동 조건에서 일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당장 그만두는 여성도 있겠지만,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미투 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여성도 있을 수 있다. 재판부는 전자만을 ‘정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남성 중심 사회에서는 후자인 여성이 훨씬 많다. 남성도 마찬가지다. 상사에게 폭력을 당했다고 곧바로 경찰에 신고하는 남성은 흔치 않다.
성적자기결정권은 누구에게나 있다. 문제는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이다. 피해 여성은 처음에는 가해자에게 위력(偉力), 즉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되는 의문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일했다. 위력(爲力), 온 힘을 다한 것이다. 전혀 다른 의미의 세 가지 ‘위력’이 모두 완벽하게 가해자에게 유리했다. 가해자의 힘, 피해자가 일을 중단하지 못한 이유, 피해자의 근무 태도.

결국 피해 여성의 ‘헌신’은 성폭력으로 돌아왔다. 재판부의 여성 노동에 대한 이해가 획기적으로 개선되기를 기대한다.

* 경향신문, 2018.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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