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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연구소
2018/4/2(월)
조회: 65
수신제가, 돌봄 민주주의 시대를 열며 / 조한혜정  
수신제가, 돌봄 민주주의 시대를 열며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근대의 미래’ 다음에 올 텅 빈 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저항이 나/우리 스스로가 평화로워지는 유일한 길이기에 “자기애의 이름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투 운동은 이런 시대적 맥락에서 일고 있는 인류사적 운동이고 아주 긴 여정의 시작입니다.

미국에 학회 강연차 와 있는데 마음은 온통 서울에 가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전해오는 ‘미투 운동’ 소식 때문이지요. 정치판이 아무리 이상한 동네라고 해도 사람에 대한 검증이 이렇게 되지 않는 동네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예술계가 아무리 독특한 인간들이 모인 곳이라 해도 그렇게까지 폭력이 난무하는 동네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87항쟁 이후 여자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도 못 본 척, 오히려 멋진 옷을 입었다고 칭찬을 해온 그들/우리는 무슨 귀신에 씌어 있었을까요?

신자유주의 광풍이 심하게 불어닥친 지난 십여년, 적나라한 사냥꾼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의 세상이 펼쳐지면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를 익혔던 유가 전통의 나라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수신’과는 거리가 먼 사냥꾼들이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성에 의한 여성의 배제와 억압이 인류사에서 가장 오래된 차별이라는 이야기를 구태여 꺼낼 필요는 없겠지요. 호모 사피엔스가 ‘소통과 상생의 사회’를 만들어 지금껏 살아온 것은 인간의 아기는 독립적 생존이 불가능한 무력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력한 생명을 돌보면서 산모와 산모의 친밀한 가족들, 그녀의 어머니와 할머니, 여형제와 남형제와 산모의 남자친구―아기 아버지일 가능성이 높은―는 함께 돌봄과 소통의 식탁 공동체를 만들어 세대를 이어가며 살아왔습니다. 돌봄 공동체가 많아지면서 그들을 연결하는 공공영역이 생겨났고 그 영역의 어른들은 아이를 기르는 일상에서 조금 자유로운, 그러나 돌봄 공동체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지혜로운 남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상과 신에게 감사의 제사를 지내고 풍요를 기원하며 장례와 혼례식을 주관하였지요. 영겁으로 이어질 자손들의 세상을 축복하면서 예술적으로, 윤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스스로를 승화시키는 수양과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 공공영역이 돌봄 공동체와 분리되면서 인류의 불행은 시작되었습니다. 성장과 진보의 이름으로 끝없는 이윤추구의 장으로 전락한 공공영역은 사기꾼과 거간꾼이 득세하는 영역이 되어버렸습니다. 인류가 지구상에 살아남은 것은 자신이 처한 환경의 불확실성을 줄이면서 지혜롭게 적응해왔기 때문인데 이 사냥꾼들은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인류사상 참으로 기이한 시스템이 생겨나 버린 것이지요. 더욱이 돈이 국경을 넘어 권력이 된 ‘금융 자본주의’는 그간의 영토화된 영역을 탈영토화하면서 영토 안의 국민들을 난민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습니다.

미디어 연구자 프랑코 베라르디는 괴물이 된 권력 마니아들이 판을 치는 이 시대는 범죄, 자살, 광기로 치닫고 있다면서 섣부른 낙관은 금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으로부터의 자율을 추구하는 일은 그칠 수 없다면서 “미래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저항해야 하고 사회적 연대, 인간적 공감, 무상의 활동, 자유, 평등, 우애 등에 관한 의식과 감수성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근대의 미래’ 다음에 올 텅 빈 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저항이 나/우리 스스로가 평화로워지는 유일한 길이기에 “자기애의 이름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투 운동은 이런 시대적 맥락에서 일고 있는 인류사적 운동이고 아주 긴 여정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정의는 공공선을 위한 지속적 돌봄이다”라는 돌봄 민주주의 운동이며, <세상의 모든 딸들>―석기시대 인류의 돌봄 공동체를 그린 엘리자베스 토머스의 소설 제목입니다―과 아들들과 함께 벌여온 돌봄 공동체 운동일 것입니다.

영화인들이 임순례 감독과 심재명 대표를 중심으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을 만들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습니다. ‘든든’을 통해 앞으로는 범죄와 광기를 부추기는 배설의 영화를 안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저마다 가슴속에 원망과 원한을 안고 고독한 삶을 마감하는 시대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삼삼오오 모여서 자기 동네에 폭력을 당하는 이가 없는지 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세상을 위해 서로를 돌보며 즐겁게 싸워가야 합니다.

* 한겨레, 2018.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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