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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가래나무
2014/8/4(월)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 되어 -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 되어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어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곱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 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두 눈에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도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되겠는가
말이 되는지도 모르겠으나




산짐승: 20년 전에 돌아가신 내 아버지에게 이 시를 읽어드렸더라면 <허, 그 놈 배떼지가 부르니 벨 해괴한 소리를 다하고 자빠졌네>라고 평하실 게 뻔한 시입니다만 때론 고단한 도시의 아버지의 무게를 내려 놓고 매달리는 처자식들을 다 매몰차게 뿌리치고 저런 처자의 기둥서방이 되어 아침 먹고 자빠져 놀고 점심 먹고 자빠져 놀고 저녁 먹고 자빠져 놀고 싶은 때도 간혹 있긴 하지요. 저처럼 나이찬 자식놈들이 김일성의 혹처럼 매달려 있는 경우에는 더구나... -[08/06-03:20:4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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