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오혜진
출판사: 오월의봄
2019/5/20(월)
조회: 40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오혜진 / 오월의봄 / 588쪽 / 26,000원 / 2019년.

페미니스트 프리즘,
한국문학을 읽는 새로운 기준

여성혐오, 소수자혐오, 순문학주의, 계몽주의, 세계문학상 집착
한국문학(장)을 떠받쳐온 관성과 폐습에 맞서,
우리 세대의 ‘정치적 취향’을 탐구할 권리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문화과학』, 2016)이라는 글로 한국문학계와 인문학계 전반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활약해온 문학연구자 오혜진이 첫 단독 저작을 펴냈다. 당시 그는 2015년 신경숙 표절 사건을 한국문학비평계의 낡은 교양과 감수성이 집합적으로 드러난 계기로 사유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이는 단순히 비평의 권위를 회복함으로써 한국문학(장)을 정화할 수 있다고 본 당시 ‘문학권력 비판론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문단권력’ 혹은 ‘문학권력’을 격렬히 비판한 논자들조차 한국사회의 급변하는 사회문화적 조건을 포착하지 못한 채 20세기적 계몽주의 프레임을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권력 비판론자들조차 기민하게 의식하지 못한 그 ‘변화’란 곧 새로운 문학주체, 독자층의 출현이다. 젊은 여성 독자를 주축으로 형성된 이들 문학주체는 페미니즘을 비롯한 소수자정치가 부상하는 맥락에서 강력하게 등장했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OO계_내_성폭력’, ‘#MeTOO 운동’, ‘#나는 페미니스트다’ 선언, 낙태죄 폐지를 외친 ‘검은 시위’와 같은 일련의 사태를 겪으며 소수자운동/문화의 경험을 축적한 이들은 한국문학(장)의 견고한 남성중심주의, 여성혐오 및 소수자혐오 경향에 이의를 제기해왔다. 이로 인해 한국문학이 자부해온 ‘보통 사람들의 민주주의’는 모조리 심문되는 중이다.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은 한국문학(장)에서 감지되는 바로 그 퇴행의 징후들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페미니즘과 소수자정치에 입각해 한국문학의 새로운 기준을 모색한 결과물이다. 1부와 2부에서는 떠오르는 (여성) 문학주체들의 경험에 주목하며 ‘정상적인 것’, ‘정당한 것’으로 승인돼온 주류 한국문학계의 지배질서와 기율들을 의심해본다. 3부는 우리가 관습적으로 상상해온 여성 서사의 모든 지점을 과감히 ‘떠나보는’ 방식으로 여성작가들의 소설을 읽는다.

4부에서는 한국사회의 ‘성적 배치’와 정상성을 편향적이고 작위적인 것으로 폭로하는 ‘퀴어’의 문화정치가 다뤄진다. 마지막 5부는 용산참사, 세월호참사 등의 사회적 참사를 따라가며 한국사회가 관철해온 ‘공동체’ 혹은 ‘공감과 애도의 형식’을 면밀하게 살핀다. 소설을 비롯해 극영화, 다큐멘터리, 웹툰 등의 디지털 매체를 가로지르는 이 비평들을 통해 우리는 문학(성) 자체를 끊임없이 갱신하게 될 것이다.

한국문학의 체질에 관하여: 여성혐오, 소수자혐오, 순문학주의, 계몽주의, 세계문학상 집착……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신경숙 표절 사태 그리고 그 사태가 촉발한 문학권력 논쟁은 한국문학계의 퇴행적 욕망이 드러난 ‘계기’였다고. 또한 다르게 물어야 한다. ‘문학/비평의 타락’이라는 손쉬운 언표가 무엇을 감추고 있었는지.

한국문학의 개탄스러운 현실을 ‘수준 미달’의 작가 신경숙 및 상업주의와 결탁한 창비의 ‘타락’으로 돌리는 것은 심각한 전가의 혐의가 있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문학이 독자를 거의 다 잃어버리고 게토화되기까지의 상황을 충분히 설명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K문학’이라는 멸칭으로 명명되는 ‘한국문학’ 특유의 ‘체질’이 여기에 큰 몫을 했다는 사실은 애써 회피되어왔다.

가부장제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여성에 대한 물리적, 상징적 폭력 및 도식적 재현을 필수적으로 경유하는 한국문학 전반의 여성혐오, 외국인 이주노동자 및 장애인, 노동자, 성소수자 등에 대한 재현의 윤리를 고려하지 않는 소수자혐오, 장르문학을 철저히 위계화함으로써 관철되는 순문학주의, 세계시장 진출 및 세계문학상에 집착하는 제국주의적 욕망 및 후진국 콤플렉스, 가족/모성애 같은 전통적 질서 수호에만 골몰하는 폐쇄적 보수성, 교조주의적 “꼰대질”…… 등으로 요약되는 이 체질들이야말로 신경숙 표절 사건 뒤에 감춰진 심각한 퇴행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젊은 독자들이 한국문학을 ‘K문학’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바로 그 ‘퇴행적 체질’의 총체를 가리킨다.

‘이야기꾼’이라는 칭호로 호출된 작가 천명관과 정유정에 대한 지배적인 비평의 흐름에서도 한국문학의 오랜 ‘욕망’은 여과 없이 드러났다. 당시 비평계는 ‘장편소설’이라는 양식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면서 두 작가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실제로 천명관과 정유정의 소설 톤과 스타일이 현격히 다른데도, 정작 그 차이는 제대로 조명되지 앟았다. 두 작가의 차이를 논해야 할 자리를 잠식해버린 ‘이야기꾼’이라는 호칭이 환기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곧 ‘남성-이야기꾼’ 모델을 중심으로 한 남성 지식인 중심의 한국문학사 전통을 자연화하려는 욕망이며, 나아가 ‘이야기의 세계’를 ‘남성의 세계’로 전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었다. 여기서 핵심은 ‘남성-이야기꾼’, ‘남성-소설가’에 대한 한국문학의 오랜 강박이 1990년대 문학과 2000년대 문학에 대한 명백한 타자화와 맞닿아 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그 욕망은 ‘1990년대 문학’과 그 후예인 ‘2000년대 문학’을 ‘여성적인 것’으로 젠더화하고, “방 한 칸에 인물 두 명만 있으면 끝나는” “한국작가들의 자기고백”으로 타자화함으로써 충족되는 것이다. 1990년대 문학과 2000년대 문학의 특성을 ‘이야기/서사 없음’으로 낙인찍는 이 방식은 “체험이란 게 학교 다녔고 연애 몇 번 했고 컴퓨터게임에 빠져본 정도의 평범한 것”이라는 식의 특정 세대에 대한 가치평가와도 긴밀히 연동한다.

한국 ‘장편 남성서사’의 신화 깨기: 누가 민주주의를 노래하는가

한국문학/비평계가 그토록 애착심을 갖는 ‘장편 남성서사’의 세계는 어떠한가? 이제는 거의 하나의 ‘장르’로 굳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편 남성서사는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한 이른바 ‘거장’ 중견 남성소설가들에 의해 생산됐다. 김훈, 이기호, 천명관 등으로 대표되는 이 중견 남성소설가들은 장편 남성서사의 양식으로 제각기 한국 근현대사를 서사화한 바 있다. 간첩조작사건이 만연한 1980년대를 다룬『차남들의 세계사』(이기호), 경제불황 이후 조직폭력배 생태계의 홍망성쇠를 1990년대 ‘조폭영화’의 문법으로 그려낸『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천명관), 일제강점기 혹은 한국전쟁기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자신과 아버지 세대의 생애사를 한국 근현대사와 등치시킨 다수의 장편소설을 펴낸 김훈까지.

이들 남성소설가의 작품이야말로 한국문학 특유의 자부심의 원천이다. 그들의 소설은 ‘개별적인 것의 진실’을 전면화한 87년 체제 이후 ‘민주화’의 결과물로, ‘가난한 자’ ‘못 배운 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와 ‘보통 사람들’의 삶을 조망해왔다. 이 남성주인공들은 계급, 학력, 인맥, 가문, 재산 등의 물질적, 상징적 자본을 소유하지 않은 하층계급 출신으로 태어나 비루하게 살아왔기에 가부장의 위치를 점하지도, 지배적 남성성을 구현하지도 못한다. 이들은 종종 역사의 파국을 경험하며, 언제나 ‘역사의 피해자’로 등장한다. 그 ‘자기 피해자화’야말로 서사를 추동하는 원리인 셈이다. 국가나 정부 같은 대문자 주체 혹은 재벌, 지식인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주류 남성서사와는 분명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만으로 충분한가? 지배층의 번영을 기원하는 우경화된 역사서사 혹은 주류 남성서사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성숙함’을 증명해주는 충분한 알리바이가 되는가? 그렇다고 보기에 이 비주류 남성 서사들은 너무나 위악적이다. 그 남성주인공들이 내세우는 ‘먹고사니즘’이 다른 한편 여성에 대한 지배와 성별분업을 자연화하고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즉 남성 주인공이 자기 자신을 폭력적인 역사에 휩쓸리는 ‘피해자’인 동시에 ‘먹고 자고 싸야’만 하는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로 형상화할 때, 거기에 여성의 자리는 없다.

이를테면 김훈의 소설들이 빈번하게 묘사하는 극도의 자연상태, 즉 국가를 잃고 난민화된 세계에서조차 그 ‘비루함’을 알리바이 삼아 스스로를 피해자화하고 연민할 수 있는 권리는 오로지 남성에게만 주어진다. 말하자면 남성은 ‘밥벌이의 숭고함’으로 요약되는 ‘난민의 철학’을 형성함으로써 ‘사유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한다. 반면 여성인물은 아무런 계보도 맥락도 없는 ‘’역사의 타자’, ‘비역사적 존재’로 등장할 뿐이다. 김훈의 소설에서 여성이 언제나 ‘피, 땀, 젖’ 같은 ‘냄새’, 즉 ‘비체abject’로만 환기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결국 스스로를 피해자로 자리매김하는 이 일련의 남성서사에서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역사’나 ‘민주주의’ 따위를 사유할 수 있는 주체의 자리를 누가 독점하고 있느냐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은 언제나 남성의 것이었고, 이는 그간 남성만이 ‘문학적 시민권’을 거머쥘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지배적 남성성을 질문에 부치고, 거대담론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그 비판적 역사의식은 실로 시민이자 역사적 주체로서 여성을 배제한 채 성립된 것이다. 즉, ‘누가 역사의 주체인가?’ 혹은 ‘누가 역사를 역사화할 수 있는가?’

비평의 백래시: 누가 ‘정치적 올바름’을 두려워하는가

이처럼 남성 소설가 중심의 ‘장편소설’ 혹은 ‘장편대망론’이 오랫동안 한국문학을 점령해왔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페미니즘 정치학의 부상으로 ‘페미니즘 소설’이나 ‘여성소설가’가 각광받고 있는 최근의 흐름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소설이 ‘여성적인 것’이라는 라벨링으로 타자화되고, 따라서 작가 스스로 ‘여성-’, ‘페미니즘-’ 같은 호명을 염려해야 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이제는 ‘페미니즘 소설’을 하나의 브랜드로써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심지어 이 뉴웨이브는 1980년대식의 교조주의적 진보에 매몰돼 있던 586세대 남성 평론가들에게도 효과적으로 각성의 계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중견 남성 지식인/비평가들의 연이은 ‘페미니스트 선언’에 걸맞게 실제로도 남성 중심적 기율들이 급진적으로 탈구축됐는지를 묻자면, 답은 부정적이다. 이를테면 최은영, 조남주, 강화길 등 최근 크게 활약하고 있는 여성소설가의 작품에 대한 중견 남성 비평가들의 비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이 남성 비평가들은 자신이 가진 ‘좋은 작품’의 기준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이때 이들이 ‘문학적 이데아’로 소환하는 것은『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한편으로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성적 노동의 희생을 노동자계급 및 민족을 위해 효과적으로 승인하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훨씬 더 꼼꼼하고 신중한 (재)독해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이 작품을 지금 여기에서 형성되고 있는 문학(성)의 롤모델로 제시하기는 곤란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비평계에서 다시 부상하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문제적이다. ‘페미니즘’이라는 라벨링은 종종 어떤 작품과 담론을 ‘문학적인 것’의 외부로 추방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활용된다. 특히 최근 비평계에서는 ‘페미니즘 소설’을 문학성이 현저히 결여된, ‘소재주의’나 ‘대중추수주의’에 편승한 산물로 ‘후려치는’ 시도가 두드러졌다. 다시 말해 ‘페미니즘/퀴어 소설’이 ‘정치적 올바름’에 구속된 것이며, ‘정체성정치’에 매몰돼 있다는 것이다. 이때 ‘정치적 올바름’은 별다른 근거 없이 ‘문학적인 것’(미적인 것)과 대립되는 것으로 상정된다. 이런 비평들은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호명이 하나의 스펙트럼으로서 개별 작품들의 고유성을 현시한다는 점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외치는 주체가 다름 아닌 ‘페미니즘 소설이 정치적 올바름에 경도되었다고’ 비판한 그들 자신이라는 점이다. 심지어 ‘페미니즘 소설이 정치적 올바름에 경도되었다’는 그 비판을 지탱하는 것은 ‘페미니즘은 남성에 대한 역차별’, ‘가해자도 일종의 피해자’라는 흔한 비논리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 양자의 압도적인 힘 차이는 고려하지 않은 채 어느 한쪽에 경도되지 않은 ‘균형’을 주문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올바름’을 물신화한 결과가 아닐까.

‘페미니즘 소설’과 관련해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정치적 올바름’이 아니라 해당 작품이 사회를 구성하는 다원적 주체들의 힘과 관계를 어떻게 재현하고 있느냐이다. 실제로 ‘정치적 올바름’의 혐의를 강하게 받은『82년생 김지영』은 결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주인공 ‘김지영’이 ‘순진하고 무고한 피해자’라는 전형을 체화하고 있으며, 따라서 ‘희생적인 여성의 좌절이라는 낭만적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82년생 김지영』의 진짜 문제는 오히려 ‘합리적인 남성’을 청자로 설정하고 스스로를 ‘무고하고 평균적인 여성’임을 주장하는 ‘김지영’이 도모하는 ‘이상적인’ 미래가 기존의 이성애 중심적 성체계를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 나아가 ‘남자와 여자’만을 상정하는 성적 질서가 포착하지 못하는 ‘다원적 주체’에 대한 상상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새로운 ‘페미니스트 서사’는 가능할까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가 열어준 풍부한 가능성과 다른 한편 이를 축소하고 추방하려는 ‘비평의 백래시’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페미니스트 서사’를 상상할 수 있을까. ‘정치적 올바름’을 물신화하지 않는 ‘페미니스트 서사’는 어떻게 가능할까. 또한 한국 여성인물들을 짓눌러온 ‘성숙’에 대한 강박을 떨쳐낼 수 있을까.

한국소설의 여성인물들은 부당한 일을 당해도 웬만해선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며, 종국에는 그런 고통의 경험을 정신적 성숙의 자원으로 삼아왔다. 좀 더 적확하게 말하면, 고통을 자원삼아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는 여성인물에게만 문학적 시민권이 부여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성장과 성숙의 서사가 애호되는 것은, 그것이 한국문학장의 ‘이성애 중심적 남성성’을 위협하지 않는 ‘안전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돈 없고 못생긴 젊은 여자가 자신의 넘쳐나는 성적 욕구 때문에 고통받거나 조건적인 쾌락을 도모하는 전무후무한 여성캐릭터(‘미지’)를 창출한 웹툰 [미지의 세계]는 매우 흥미로운 사례로 손꼽힌다. ‘미러링’의 방법론을 통해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청년담론과 성 각본에 대한 교란을 꾀한 것이다. ‘미지’가 여성혐오적 청년세대론에 대한 미러링을 통해 증명해보인 것은 ‘찌질’과 위악이 남성만의 것이 아니며, 여성 역시 ‘착한 소수자’가 아닌 ‘호전적 전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식의 주체화는 무엇보다도 1990년대를 전후해 ‘이성애 규범을 벗어나는 이야기’에 대한 교양과 감수성을 훈련해온 동아시아권의 젊은 여성 주체들의 문화적 역량에 힘입은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한국에서 성소수자로 산다는 것’의 문제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직접 서술한 [불온한 당신](2015)과 [위켄즈](2016)는 ‘퀴어영화의 새 장을 열어젖혔다’고 평가받는다. [위켄즈]가 게이를 ‘이반’이지만 동시에 ‘평범하고 사람 냄새 나는’ 존재로 재현한다면, [불온한 당신]은 레즈비언을 불안전하고 위태로운 존재로 둔다. 레즈비언인 ‘나’가 동성애혐오세력이 판 치는 불온한 사회에서 불온한 존재로 남을 권리 그 자체를 존중하는 것이다. 공존하면서도 서로 다른 선택을 보여주는 이 두 영화는 퀴어주체의 개별성과 보편성에 대한 가장 진지한 탐구가 되기에 충분하다.

‘곁’을 넓히는 사랑과 슬픔의 형식

‘용산참사’, ‘세월호참사’ 등 일련의 사회적 참사 역시 한국문학, 나아가 한국사회가 관철해온 ‘공동체’와 ‘정상성’의 감각을 다각도로 심문한다. 그런 참사들로부터 촉발된 인문학적 담론들, 이를테면 ‘애도의 윤리와 애도의 형식’, ‘당사자정치와 연대의 정치’ 같은, 이제는 클리셰가 돼버린 테제들을 우리는 더욱 치열하고 면밀하게 점검해야 한다. 그 담론들에서 축적된 지혜야말로 한국사회의 지적, 문화적 아카이브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특히 세월호참사와 관련해, 애도의 조건으로 ‘육친성’이 강조되는 맥락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세월호 유가족들, 특히 부모들의 투쟁은 ‘육친’이라는 조건이 다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주체화의 계기가 된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이 ‘당사자정치’야말로 모든 운동 중 여전히 지속성과 주체성, 진정성이라는 동력을 가장 오래 간직하며 전개되는 정치양식이라는 점도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당사자정치’ 혹은 ‘나는 너가 될 수 없다’라는 인식이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자기방어와 자기보존의 수사학으로 사용되는 경우를 빈번히 목도한다. 예컨대 ‘나는 남자라서 잘 모르겠지만’ 혹은 ‘나는 남자라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와 같은 발언들은 어떤가. 이 발언들에서 암시되는 것은 사태를 ‘나의 문제’로 인식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연대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의지이다. 그러나 그런 논리대로 과연 정말 남자는 남자일 뿐이고, 여자는 여자일 뿐이며, 노동자는 노동자일 뿐이고, 장애인은 장애인일 뿐이며, 외국인은 외국인일 뿐이고, 유가족은 유가족일 뿐인 걸까. 우리가 그토록 민주주의를 열망해왔던 것은 바로 이러한 불변의 정체성론을 전복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당사자가 지닌 고통의 개별성과 특수성을 사상하지 않으면서 연대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 공감과 애도의 형식은 어떻게 가능할까. 어쩌면 세월호 생존학생과 형제자매들의 육성기록집『다시 봄이 올 거예요』가 이 물음에 응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존학생’과 ‘유족이 된 형제자매’라는, 서로 만나기를 조심스럽게 저어해온 이질적인 존재들의 만남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이들이 ‘부모의 슬픔’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의 슬픔을 지닌다는 점에서 서로 깊이 공감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 관계에서야말로 우리는 ‘곁’을 확장할 수 있는 사랑과 슬픔의 형식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지극히 ‘정치적인’, 취향의 각축전을 그리며

한국문학(장)과 비평계에 두드러진 일련의 퇴행들을 사유해보자는 제안은 결코 한국문학 자체를 부정하자거나 비평을 무용한 것으로 치부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의심해야 할 것은 특정 주체에 의해 관리, 통제되는 이념적 실체로서의 단일하고 동질적인 한국문학이지, 한국문학의 존재방식 자체가 아니다. 이는 ‘국민성’이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나라 국민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역사적 경험을 통해 공유되는 ‘공통감각common sense’은 엄존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문학/비평은 바로 그 공통감각을 기반으로 형성되며, 또한 그것에 도전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공통감각을 창출하고 갱신해나가는 사회담론의 한 양식이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한국문학을 매개로 ‘더 나은 공동체’를 상상할 권리가 있다.

이것이 한국문학(장)에서 감지되는 퇴행을 단순히 ‘비평의 위기’라는 말로 요약할 수 없는 이유다. 문학이 일종의 ‘취향공동체’로, 비평이 ‘취향의 정당화’ 문제로 수렴된 지는 벌써 오래됐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더 나은 ‘독서취향’이고, 더 나은 ‘감식안’이며, 더 나은 ‘공동체에 대한 비전’인지를 치열하게 겨루는 일이다. 자신의 취향을 형성하고, 그 취향을 타인의 그것과 다툰다는 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취향의 정당화’를 위해서는 서로의 세계관을 강도 높게 부딪쳐야 하고, 무엇보다 ‘좋은 취향’을 갖기 위해서는 과거의 문학관과 비평적 자원들까지 모조리 학습하고 활용해야 한다. ‘자유주의의 산물’이라는 혐의를 끈질기게 받아온 ‘취향’이야말로 사실은 치열한 중층결정의 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21세기의 비평은 바로 그 취향을 지극히 정치적인 장소로 사유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계몽’이 아니라 자신의 ‘좋은 취향’을 시민사회의 공통감각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의 형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저 : 오혜진
문학연구자.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근현대 문학·문화론을 전공하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서사·표상·담론의 성정치를 분석하고 역사화하는 일에 관심 있다.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그런 남자는 없다』, 『을들의 당나귀 귀』, 『민주주의, 증언, 인문학』, 『저수하의 시간, 염상섭을 읽다』 등의 책을 함께 썼고, 「‘심퍼사이저sympathizer’라는 필터: 저항의 자원과 그 양식들」, 「카뮈, 마르크스, 이어령: 1960년대 에세이즘을 통해 본 교양의 문화정치」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2015~2017년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했고, 현재 대학에서 젠더 및 섹슈얼리티 개념을 중심으로 문학/문화 비평론을 가르친다.

* 오월의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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