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디언 공부 :::

이름: 산풀
2005/2/7(월)
조회: 4447
관계, 그 동시성의 세계-서정록  
북미원주민 이야기 19

관계, 그 동시성의 세계

북미 인디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움직임이 밖으로 드러난 것을 바람, 흐름, 결, 떨림이라 생각했지요. 우리의 조상들도 같습니다. 그래서 신라 말 최치원 선생은 "이 땅에 아름다운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포함삼교(包含三敎)하고 접화군생(接化群生)하니..."라고 하셨지요. 이런 풍류적 사고는 고구려 벽화와 이 땅의 고대 유물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습니다.
풍류적 사고는 관계적 사고를 바탕으로 합니다. 서구식 교육을 받은 우리는 주관적이고 자아 중심적인 사고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내 주장을 내세우고,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나를 앞세웁니다. 그러나 풍류의 문화, 즉 관계의 문화, 생명의 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전통 세계나 제3세계에서는 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상대방을 높입니다. 그리고 나를 낮춥니다. 왜냐 하면, 모든 존재는 저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고, 각자에게 주어진 임무와 역할이 있기 때문에, 내가 소중한 존재이듯이 상대 또한 나 못지않게 귀중한 존재이기에... 이 세상은 그렇게 자신의 임무와 역할을 가진 수많은 존재들의 상호 관계와 상호 의존에 의해서 유지됩니다. 그 하나하나의 존재가 주인이며, 소우주며, 신적 존재인 것입니다.
북미 인디언들은 이러한 사고에 대해 '원(circle)'의 상징을 가지고 말합니다. 원 위에서는 위아래가 없습니다. 또, 시작과 끝이 따로 없습니다. 각자가 서 있는 자리가 모두 주인입니다. 주인이되, 과정에 있습니다.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어 유기적으로 움직입니다. 하나가 움직이면 다른 것도 따라서 움직입니다. 그렇게 전체에 변화가 옵니다. 그래서 주인이되, 과정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정이란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만나고 섞이고 흩어지고, 또다시 만나고...
북미 인디언들은 물질 역시 영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수고해 거둔 식량이라도 위대한 신령이 가족과 이웃과 함께 나누어 쓰라고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나눔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거지요. 왜냐하면, 선물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고, 영혼은 우리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식량이나 재물을 기꺼이 이웃과 나누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들의 사회에서는 물질이 돌고 돕니다. 서구 사회에서 선물이 종종 'give and take(주고받기)'의 대상이 되어, 일종의 거래 관계를 형성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오직 '기꺼이 나누어 줄(give away)'뿐, 받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찍이 성 프랜시스가 말한 것처럼 나누어 줌 속에 이미 '받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누어 주는 사람은 그것으로 이미 행복합니다. 더 바랄 게 없는 거지요. 더 바란다면 그것은 기꺼이 줌이 아니라 거래를 위한 줌일 뿐입니다. 그저 좋아서, 그저 감사해서 줄 뿐입니다. 그러면 받은 사람은 나눌 선물이나 재물이 생겼을 때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렇게 선물은 돌고 돕니다.
그렇게 북미 인디언 사회에서는 모든 게 원 위에 있습니다. 사람도, 동식물도, 해도, 달도, 재물도, 모두 원 위에 있습니다. 산과 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 또한 같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동안에 다른 존재의 숨결과 섞여 돌고 돕니다. 그렇게 원은 계속 확장해 갑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우리의 영혼 또한 성장해 갑니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생명의 원', '원 안의 원'입니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존재는 원 속에서 '평등하고 대등한' 관계를 맺습니다. 주인으로서, 나그네로서...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또한 하나의 원으로 순환합니다. 몸이 아프면 마음과 영혼 또한 병듭니다. 영혼이 병들면 몸이 성할 수 없고,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또한 기울거나 넘치게 됩니다. 마음이 성할 수 없고,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또한 기울거나 넘치게 됩니다. 마음이 어느 한편으로 치우쳐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원은 언제나 균형과 조화의 법칙을 그 안에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원은 가정에서는 가족을 보살피는 어머니를 중심으로 확대됩니다. 어머니는 살림의 중심이기도 하지만 세대와 세대를 잇는 중심이기도 합니다. 바로 다음 세대를 이을 아이를 낳기 때문이지요. 이런 연유로 인디언들은 어머니의 모성을 모든 가치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대지의 어머니로 연결됩니다. 대지의 어머니야말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실어 기르는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인디언들이 말하는 '자연의 법'은 바로 이 어머니 대지의 법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인디언들이 말하는 원은 수많은 차원을 넘나들며 균형과 조화를, 평등과 상생을, 주인인 동시에 텅 빈 자리를 가르치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심원한 의미를 갖는 원의 핵심은 언제나 관계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나 혼자 주인 되는 세상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주인되는 세상, 그래서 모두가 더불어 행복해지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 바로 인디언들의 세상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 식물, 곤충, 돌멩이, 심지어 먼지, 티끌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원은 존중을 가르칩니다. 라코타족의 추장이며 말하는 자였던 '고귀한 붉은 얼굴'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원은 신성한 힘을 갖고 있다.
원을 그리고 앉을 때,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
원을 그리고 앉으면, 누구도 당신 앞에 있지 않고 누구도 당신 뒤에 있지 않다.
누구도 당신 위나 아래에 있지 않다.
원을 그리고 앉아 기도하면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다.

생명의 고리 역시 하나의 원이다.
이 둥근 고리 속에는 모든 종족, 모든 나무, 모든 식물을 위한 각각의 자리가 있다.
이 지구를 다시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생명의 그 완전성을 존중해야만 한다.

존중한다는 것은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존중한다는 것은 대결하지 않는 것이다.
비난하지 않는 것이고, 놀리지 않는 것이다.
특히 어른들을 존중한다는 것은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다. 배반하지 않는 것이다.
훔치지 않고 혼자 독차지하지 않는 것이다.
존중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거나 명령을 내리지 않는 것이다.
존중한다는 것은 화가 나서 소리치거나 나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이다.
존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다.

존중한다는 것은 상품이 아니다. 존재 방식이다.

그것은 우리의 손이 아니라 가슴 속에 있다.
그것은 모든 삶을 위한 것이다.

그대가 한때 자유로웠음을 기억하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은
그대가 한때 자유로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일이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이다.

이 관계의 문화와 관련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의 생일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축하해 줍니다. 그 생일이란 그저 달력에 있는 몇 월 몇 일일 뿐입니다. 오직 숫자적인 의미만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인디언들은 조금 다릅니다. 그들 역시 태음력을 사용하므로 날짜를 기억하자면 얼마든지 기억할 수 있으련만 그들은 몇 월 몇 일식으로 생일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옥수수꽃이 필 무렵 태어났다든지, 첫눈이 오던 날 태어났다든지,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태어났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합니다. 또는 딸기가 익는 날 태어났다든지, 눈이 녹는 날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전쟁터에 나가 죽은 아들의 생일을 묻는 백인에게 대답하는 한 노인처럼...

음, 그것이 정확히 몇 월 몇 일인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그 날을 기억할 수 있어.
그것은 그 해 늦은 봄,
달콤한 옥수수가 막 한 뼘쯤
땅 위로 올라왔을 때야.
그 애는 그 날 태어났어.

그러므로 그들은 생일을 기념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가 태어날 무렵 자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 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디언들에게 생일이 우리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 현상의 변화를 통해서 그 아이의 삶에 어떤 조짐이 있을지, 또는 어떤 축복이 있을지를 가늠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신성한 상징으로 삼는 것입니다. 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해서 이것이 있기에.
자연히 새해 첫날을 말하는 방식도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양력이나 음력 1월1일을 설날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수적으로 새로 시작하는 의미만을 가질 뿐입니다. 동양의 역법은 조금 달라서 동짓달에 벌써 천둥번개가 땅 밑에서 꾸르릉거린다고 말하지만, 역시 천문상의 변화를 시작의 기점으로 삼는 점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아니 이 땅의 고대 조상들은 그렇게 새해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북방의 민족들은 남쪽으로 날아갔던 기러기가 돌아오는 날을 새해의 시작으로 삼았으며, 남쪽의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三韓)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삼월 삼짇날을 새해 첫날로 삼았습니다. 새해라면 무언가 그에 합당한 자연의 변화와 조짐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북미 인디언들 역시 겨우내 얼었던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때를 새해의 시작으로 여기거나, 철새들의 이동, 또는 나무에 새싹이 돋는 것을 새해의 시작으로 삼곤 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새해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한 생이 시작되는, 또는 한 생명의 탄생과 같은 것이고 보면, 그에 상응하는 자연의 변화가 반드시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그 자연의 변화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자신들의 내면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란 정확히 말하면 '동시성'입니다. 안과 밖이 조응하는 세계, 나와 우주가 조율하는 세계지요.
세상엔 독불장군식으로, 저 혼자 잘나서 이루어지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서로 협력하고 조우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동시성의 관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마음의 소통에 의해서, 뜻의 일치를 통해서 옵니다.
물질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이런 동시성의 관계란 아마도 우연의 일치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길을 걷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이런 동시성이야말로 우리가 사람답게 사는 모습의 기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길을 걷는 사람들은 초기의 어느 단계에서 이 동시성의 현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왠지 우산을 들고 나가고 싶어서 들고 나갔더니 정말로 뜻하지 않게 비가 왔다든지, 옛 친구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친구로부터 전화나 편지가 왔다든지, 또는 좋은 일이 있을 때면 집안의 난초에 꽃이 피거나, 가뭄이 들어 기도하는데 곧바로 비가 내린다든지 등등의 일들이 자주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동시성에 대해 어떤 이들이 텔레파시를 언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또다른' 원의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연못에 이는 물결의 파문이 연못 가장자리에 동시에 전해지듯이, 밤 하늘으 별빛이 온 세상에 고루 닿듯이... 그러므로 이 동시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의 관계를 찾아가는 통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내가 가야 할 길의 지표기도 하고, 이정표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동시성은 '길(道)'과 같습니다. 길은 방향과 지향점을 갖고 있습니다. 또다른 길과 만나기도 하고 여러 개로 갈라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만났다 헤어졌다 하면서 모래톱과 같은 흔적을 삶에 남깁니다. 영적 교사들이 말하는 re-membering은 바로 그 길이 남긴 흔적들의 의미를 모으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포니족의 영적 교사 데이비스의 어머니가 어린 데이비스에게 말하던 것처럼...

인생이란 길과 같은 거란다. 우리 모두 그 길을 걸아가야 해. 만일 우리가 그만두면 그것은 길 위애서 걷는 것을 그만두는 것과 같단다. 밤이 지나면 우리는 일어나 그 길을 다시 걸아야 하지. 그 길을 걷다 보면, 우리는 앞에 나타나는 조그만 종이 조각들과 같은 경험들을 발견하게 된단다. 그러면 우리는 그 종이 조각들을 집어서 주머니에 넣어야 해. 우리가 만나는 그 하나하나의 종이 조각들을 그렇게 주머니에 넣어 두다 보면, 어느 날 우리는 충분한 종이 조각들을 갖게 된단다. 그러면 그것을 한데 모아 그 조각들이 말하는 것을 읽는 거야. 누구나 충분한 종이 조각들을 가질 수 있단다. 그 안에 있는 내용을 읽은 다음, 그것을 가슴에 가져가는 거야. 그러고는 그 종이 조각들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길을 계속 가는 거란다. 왜냐하면, 더 집어야 할 종이 조각들의 많이 있기 때문이지. 나중에 그들을 꺼내서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좀더 많을 것을 배우게 된단다. 만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내내 이렇게 종이 조각들을 모은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더욱 많은 것을 읽게 되겠지. 우리가 더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는 더 많은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된단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지혜로워지는 거란다. 설령 지혜로워지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과거보다는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거든.

이것이 바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동시성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동시성은 사람들의 이름 속에서 발견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모두들 축복과 함께 그 아이의 운명에 걸맞는 이름을 지어 줍니다. 이러한 현상은 전 세계저긍로 똑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이름은 어떻습니까?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습니다. 음성학적으로 대상을 가리키는 지시의 역할은 하지만 영적인 의미는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개' 하는 이름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느낌도 받지 못합니다. -물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면 그 때 비로소 어떤 감성이 오겠지요. 그러나 그를 모른다면?-예를 들어 봅시다. '이청강'이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의 이름은 사물을 지칭하는 기능은 지니지만, 그 이름이 주는 영적 느낌은 없습니다. 이것을 한자로 옮겨 적으면 조금 낫습니다. 李靑江. 한자를 아는 이들은 금방 청강이란 이름이 '푸른 강'을 뜻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한자를 모르는 세대에게 청강이란 이름은 어떤 느낌도 주지 못합니다. 이름은 있되, 그 이름이 갖고 있어야 할 영적인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름을 지을 때는 거기에 좋은 뜻과 기원을 담아 만듭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이름을 짓는 방식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출세나 명예를 얻고, 재물을 얻는 것들을 기준으로 좋다는 이름을 짓습니다. 거기에 자연의 영적인 요소가 들어갈 자리는 매우 적습니다. 게다가 듣는 사람의 귀에는 그마저도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저 이청강이란 소리만이 귓전을 때릴 뿐입니다.
그러나 자연의 소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람 소리 하나, 물 흐르는 소리 하나에도 생명이 있고, 삶이 있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청강이라는 이름 속에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기도가 없습니다. 영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그에 견주어 인디언들의 이름은 어떻습니까?
'늑대와 함께 춤을', '붉은 구름', '한밤중의 노래', '달과 함께 걷다', '노래하는 물', '바람을 타고 달리는 여인', '얼굴에 내리는 비', '행복하게 춤을 추는', '서 있는 옥수수', '두 발로 선 곰' 등등.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신선하고 영혼이 반응합니다.
그들의 이름은 대개 신명 탐구를 통해서 받은 영적인 이름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어떤 영적인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 때 그들의 이름은 비로소 상징적 의미를 갖습니다. 내가 과정에 있는 존재임을, 그리고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때문에 그들의 이름은 존재로 들어가는 문과 같습니다. 마치 인디언들이 그들의 복장에 장식한 상징 문양이나 머리에 꽂은 독수리 깃털을 통해서 신을 보는 것처럼.
따라서 그들의 이름은 일종의 기도와 같습니다. 만트라(mantra, 眞言)와 같습니다. 그 이름을 부르면 영혼이 열리는.... 그렇게 그들은 이름을 통해서 영적인 내밀한 존재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압니다. 이렇게 그들의 이름은 사람들에게 그를 어떤 방향과 성격과 예지를 던져 줍니다. 그리고 예지의 공유는 자연스럽게 그를 어떤 방향으로 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바로 여기에 관계에 내재해 있는 동시성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한자식 이릉은 변화가 필요합니다. 이름을 들으면 즉각적으로 영적 감성이 발동하는 순수한 우리말로 말이지요. 왜 이런 시(詩)도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릉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이란 그와 같은 것입니다. 허나 영적 감성이 없으면 이름은 결코 꽃이 되지 않습니다. 관계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동시성이 내재하지 않는 관계는 공허합니다.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마치 알맹이 없는 쭉정이처럼. 그런 공허한 관계는 우리를 성장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가 대지에 발을 디디고 있어도 어머니 대지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는 것처럼...

관계란 이처럼 풍부한 함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주는 아름다움으로 해서 우리는 균형과 조화 속에서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지요. 그러고 보면 인디언들의 원의 상징은 아주 큽니다. 우리를 내가 아닌 공동체로, 세상으로, 우주로 나아가게 합니다. 전체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서로 빛을 반사하는 거울처럼 동시성이 보석처럼 반짝입니다.

서정록 /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이론만이 아닌 실천으로 함께 살기를 모색하던 중, 자연과 동화된 참된 삶을 살고 있는 북미 원주민 문화에 심취하게 되어, 그 사상과 문화 알리기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백제금동대향로』,『지금은 자연과 대화할 때』가 있습니다.

*생태적인 세상, 아름다운 소통 『이장』, 2005년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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