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디언 공부 :::

이름: 산풀
2005/1/11(화)
조회: 4050
기억의 영적인 의미-서정록  
북미 원주민 이야기 18

검은호수 서정록

북미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사는 이유는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렇게 우리의 관계를 확장하고, 모든 존재와 하나 되기 위한 것이라고...
이 말은 우리의 삶이 일회적인 덧없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먼 과거로부터 현재는 물론 먼 미래까지 이어져 있는 것임을 암시해 줍니다. 아마도 영성, 또는 영혼에 대해서 말하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영성, 또는 영혼에 대해서 말할 때는 현재의 삶 못지 않게 과거의 삶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인디언들의 영적인 길을 조금씩 공부하면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인디언 영적 스승들이 삶의 여정을 가리켜 'remembering'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 remembering은 정확히 're-membering'을 뜻합니다. 여기서 're-'는 '다시'란 뜻이고 'membering'은 그 자체로 '기억하기'의 뜻도 있지만 '구성원이 되기'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remembering이란 말 속에는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들을 다시 살려내고 재구성하여 영적으로 온전한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re-membering의 과정이 우리의 일상적인 지식과 인지 과정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도 갓난아이 적 일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개 걸음마를 떼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5,6살 무렵이 되어야 비로소 어린 시절의 일들이 기억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억의 측면에서만 보면 우리는 이 세상에 와서 산 날들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 교사들은 여기서 다시 '전생(前生)'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는 분명 어딘가로부터 이 곳으로 온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 '어딘가'에서의 삶이 바로 전생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의 세계에서는 그 '어딘가'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에 '다가라'라고 하는 부족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는 여인이 임신을 하면 마을의 영적 교사를 모셔 옵니다. 그리고 임산부 앞에 마주 앉아서 뱃속에 든 아이와 대화를 합니다.

너는 누구니? 어디서 왔니? 왜 이 곳에 오려고 하니? 이 곳에 와서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이니?

그러면 뱃속에 든 아이는 영적 교사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자신은 아무개고, 이러이러해서 이 세상에 오고자 한다고... 그 후 아이는 태어납니다. 사람들은 조상님이 다시 오셨다고 정성껏 아이를 키웁니다. 아이들의 영은 맑은 호수처럼 투명하지요. 그러나 커 가면서 아이들의 영이 차츰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다가라 부족에서는 아이들이 사춘기에 이르면 성년식을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머니 뱃속에서 영적 교사에게 했던 말을 다시 기억하도록 일련의 의례를 행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아이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에 온 이유와 이 곳에서 하고자 하는 일을 다시금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영적 교사들은 현실 세계의 저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귀에 들리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세계에서의 기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게 바로 우리의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해도 영혼들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두 차원의 삶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세계와 관계된 의식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영혼의 차원입니다. 그런데 현실의 세계는 개별적 존재들로 구성된 세계입니다. 그에 견주어 영적인 세계는 모든 존재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모든 존재들을 관통하여 흐르는 생명의 에너지처럼. 따라서 영적인 세계는 이 세상의 수많은 존재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떠받치고 있는 우리의 존재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를 관통해서 흐르는 생명력, 우주 생명과 같은 것이 없다면, 개개의 생명들이 존재할 수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양자의 존재 방식과 인지 방식은 다릅니다. 전자는 우리의 몸의 감각과 이성적 사고를 통해서 인지를 하지만, 후자는 영혼을 통해서 인지를 합니다. 인디언들은 이것을 종종 '느낌' 또는 '직관'에 의한 인지 방식이라고 말하지요. 이 때 느낌은 개별 감각에 의한 지각이 아니라 감각 전체와 마음이 동시에 작용해서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인지 방식은 고대인들이 숨결이나 피를 통해 영성을 이해했던 것과 아주 유사한 방식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현대인들이 후자의 방식에 매우 서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디언 영적 교사들은 영성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침묵과 명상을 권합니다. 침묵과 명상은 느낌과 직관의 힘을 길러 주고, 궁극적으로 두 차원의 세계를 하나로 연결해 주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때 비로소 영적인 성장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인디언들이 중요시하는 '꿈'과 '신명'도 그 연장선상에서 비로소 이해가 가능합니다. 허나 영적인 성장은 타인의 강요에 의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지요. 오직 자기 자신이 영저긍로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선택함으로써만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remembering이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성장이라고 하면 전적으로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정화하고, 한 개인보다는 가족과 이웃과 사회를 위해 헌신하느냐에 달린 문제라고 말이지요.그것은 한편으로는 맞는 이야기입니다. 왜냐 하면 개인이 없는 집단이란 없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개인의 삶이 얼마나 성숙해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신이 그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그의 재능과 가족 관계와 환경, 사회적 조건 등-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그의 의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성장을 전적으로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것에 대해 인디언들은 견해가 좀 다릅니다. 그들이 보기에 영적인 성장은 개인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집단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아이들이 영적 성장을 위한 길을 가기 전에 먼저 조상들이 남겨 준 신화나 전설 등을 들려 줌으로써 기억이 갖고 있는 의미를 깨닫게 해 줍니다. 말하자면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신화나 전설 등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remembering을 하는 가장 중요한 지혜의 축적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겨울철 움막 안에서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어르신들이 아이들과 마주 앉아 들려 주는 이야기 마당은 매우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세네카족'의 영적 지도자들이 들려 주는 '네 가지 선물'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신이 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하고 수많은 존재들을 만드셨단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랑을 있는 대로 듬뿍 주었지. 그것이 신의 첫번째 선물이야. 그런데 이 세상의 존재들이 받는 것만 알고 주는 것은 모르는 거야. 그래서 신이 안 되겠다 싶어 각각의 존재들을 둘로 나누어 남자와 여자가 되게 한 거야. 암컷과 수컷으로 말이지. 그렇게 해서 각자가 주는 자이면서 받는 자가, 받는 자이면서 주는 자가 되게 하셨단다. 그게 두번째 선물이야.
그런데 신이 보니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거야. 그래서 이번에는 이 세상의 존재들에게 입으로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셨지. 말이란 서로 상대방과 대화하는 것이잖아. 그렇게 대화를 하다 보면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고,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면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 행복해지게 되거든. 그렇게 서로를 돌보고 서로의 마음을 함께 나누라고 말을 주셨지. 그게 세번째 선물이야.
하지만 말이 있어도 매일 같은 말만 하면 재미없잖아. 또, 내적으로 성장하지 않고 언제나 그대로라면 무슨 발전이 있고, 무슨 재미가 있겠어. 그래서 각각의 존재들이 내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직관의 힘을 주셨지.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도록 말이야. 그것이 바로 네번째 선물이야.
이렇게 신이 네 가지 선물을 주신 다음에야 이 세상은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단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는 북미 인디언들의 영적인 지혜가 고스란히 농축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와 같은 창조 이야기를 통해서 태초에 신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 무엇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존재가 모두 신의 창조에 동참하는 '움직일 수 없는 존재(不移者)'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나보다는 가족과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화와 전설 속에는 이처럼 신의 태초의 창조 이야기는 물론, 인간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 토끼의 귀가 왜 그렇게 길어졌는지, 곰은 왜 그렇게 꽁지가 짧은지, 해와 달은 어떻게 생겼는지, 왜 그처럼 낮과 밤으로 교대로 뜨는지, 또 산과 강은 왜 생겼으며, 또 어머니 대지가 하는 일은 무엇인지 등등, 이 세상의 온갖 현상과 관계에 대한 영적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세네카 인디언들이 들려 주는 이야기들 중에는 또 다음과 같은 고래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지가 생겨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이야. 많은 수생 생물들은 뭍 위로 올라가기보다는 물 속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원했지. 고래도 그렇게 바다에 남았어. 그런데 어린 고래 한 마리가 뭍 위의 생활을 경험해 보고 싶어하는 거야. 그는 바위로 된 해안선을 따라 들어가다가 바위에 고대인들이 기록해 놓은 글을 발견했지. 어린 고래는 그 글이 고대의 조상들이 남겨 놓은 글임을 단번에 알았어. 왜냐 하면, 고래는 어머니 대지에서 일어나는 일에 늘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기록하는 임무를 가졌기 때문이지.
어린 고래는 바다로 돌아와 어르신 고래에게 그가 본 것을 말씀드렸어. 그러자 어르신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거야.
"네가 발견한 것을 알려 줄 만한 친구를 찾아보거라."
그래서 어린 고래는 다시 그 해안가로 돌아왔단다. 그리고 그 곳에서 두 발 달린 사람 한 명을 만났지. 그는 고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거든. 어린 고래는 그 사람과 물가에서 헤엄을 치며 많은 시간을 보냈어. 그리고 적당한 때가 되자 그를 고대의 조상들이 남겨 놓은 글이 있는 그 바위로 데려갔지. 바다의 물이 빠지자 마침내 고대의 조상들이 그 곳에 적어 놓은 글이 수면 위로 떠올랐겠지. 두 발 달린 사람은 그 글을 통해서 비로소 고래가 두 발 달린 사람의 조상이라는 것과 고대애는 동물들과 새들 또한 사람처럼 말하고 알아들었다는 것을, 그래서 사람들과 똑같이 대화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또, 식물들도 소리와 에너지를 통해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도...
그렇게 우리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존재 방식만 우리와 달랐지, 모두 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야.

대지 어머니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기억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고래는 이렇게 자신이 보고 기억하는 것을 인간에게 알려 주었고, 우리는 비로소 인간과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와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기억이 갖고 있는 이런 영적인 의미의 압권은 단연 세네카의 영적 교사 '트윌라 니치'가 들려 주는, '돌 부족(stone tribe)'의 영적 교사 '기육'이 들려 주는 인류의 역사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1991년에 『우리 이전의 또 다른 위원회의 불꽃』이란 제목으로 출판된 바 있는 이 이야기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려서 부족의 추장이셨던 할아버지로부터 '돌(stone)의 언어'에 대해 틈틈이 배워 돌과 대화를 할 수 있었던 트윌라 니치는 성장해 부족의 주술사가 된 어느날, 일곱 모가 난 돌 부족의 주술사 기육으로부터 우주의 창조와 인류의 역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태초에 이 세상에는 텅 빈 공간만이 있었어. 그 때 구름 같은 것이 일어나면서 창조에 필요한 빛과 생각과 같은 것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지. 신은 영원한 대지를 만드시기 전에 먼저 물질에게 '듣는' 힘을 선물로 주셨어. 그런 다음에야 영원한 대지와 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거든. 그 다음에 해와 달이 만들어졌지. 그제야 낮과 밤이 생기고 바다에는 밀물과 썰물이 일어나기 시작했어.
그 때 신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거야. "너는 앞으로 기육이라 불릴 것이다. 너는 '돌 사람'이니, 이제부터 대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보고 기억해 두었다가 대지 어머니의 지혜를 알고 싶어하는 존재들이 있거든 그들에게 그 이야기들을 들려 주거라." 그렇게 해서 나는 우주의 창조와 대지 어머니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존재가 되었지. 그리고 이 세상이 창조되기 직전에 열린 '첫번째 부족 위원회'에도 참가했어. 그 회의에는 '하늘 사람'들이 주로 참가했거든.
그 첫번째 부족 위원회에서 마침내 우리의 여섯 형제 부족의 창조를 결정했는데, 그 여섯 부족은 '식물 사람', '동물 사람', '곤충 사람', '땅 위를 기어다니는 사람', '물고기 사람', '날개 달린 사람', '두 발 달린 사람'이야.
마침내 신이 여섯 형제 부족을 차례로 창조하셨는데, 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 거야. 하늘 사람들은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지만, 영혼만 있고 몸과 가슴은 없거든. 그 하늘 사람들이 지상의 형제들처럼 몸과 가슴을 가지고 그들처럼 느끼고 나누고 경험하기 위해 자신들의 영적인 지혜의 선물을 가지고 다투어 지상의 형제들 속으로 내려가기 시작한 거야. 그드로가 하나 되기 위해... 그들은 몸과 가슴이 없는 영적인 존재만으로는 성장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거든. 그래서 성장을 계속하기 위해 기꺼이 지상의 존재들과 함께 하기로 결정한 것이지. 마치 하늘에서 축복처럼 쏟아지는 비처럼 말이야. 그 하늘 사람들의 영적인 지혜 덕분에 지상의 여섯 형제 부족들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균형과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존재가 되었지.
그렇게 해서 드디어 첫번째 세계가 창조되었어. 그 첫번째 세계는 사랑으로 가득 찬 세계였지. 세상은 아름다움과 영적인 지혜가 넘쳐났어. 대지에는 나무들과 아름다운 꽃들과 동물들, 그리고 새들로 가득했고, 강과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행복하게 뛰어놀았지. 물론 두 발 달린 사람도 함께 말이야. 그 때 두 발 달린 사람 속에는 하늘 사람과 땅 사람이 함께 공존했어. 그렇게 그들은 두 발 달린 사람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을 배웠지.
그리고 나는 '노그'라는 최초의 인간 친구를 갖게 되었지. 나는 그에게 다섯 피부 색깔을 가진 인간의 임무에 대해 말해 주었어.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 최초로 내적 평화와 성장을 위한 의례들을 마련할 거라는 것을. 그리고 갈색 피부를 가진 인간은 어머니 대지의 기록과 생존을 위한 본능적 지식을 갖게 될 거라는 것, 그 다음 붉은 피부를 가진 인간은 어머니 대지와 그 위에 살고 있는 생명들의 충실한 보호자가 될 거라는 것, 노란 피부를 가진 인간은 새로운 지식 체계를 세우게 될 거라는 것, 흰 피부를 가진 인간은 이 세상에 진리와 공정함을 가져오게 될 거라는 것 등등을 말이지.
첫번째 세계에서는 말이 필요 없었어. 모든 존재가 말이 없이도 자유롭게 서로 대화하고 생각을 나눌 수 있었으니까. 서로가 공경하면서 말이야. 우리는 그것을 '사랑의 언어(Hail-lo-way-an)'라고 불러. 아직 인간의 언어가 태어나기 전이지. 침묵과 몸짓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었어. 그 때는 하늘에 평화의 무지개가 걸려 있었지.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었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 진정한 '아름다움의 길'이었지.
하지만 인간들 중에는 탐욕과 야망과 다른 사람들 위에 올라서려는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있었고, 결국 첫번째 세계는 '굽은 길'을 가는 그들 때문에 불에 의해서 멸망하고 말았지.

그렇게 기육은 그 다음 얼음에 의해서 멸망했던 두 번째와 물에 의해서 멸망했던 세 번째 세계의 비극에 대해서 말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아름다움의 길을 잃어 갔던가를, 그리고 어떻게 사랑의 언어를 잃어 갔던가를... 그런 다음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인 분열과 갈등의 네 번째 세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네 번째 세계는 태초의 신이 이 세상에 내려 주셨던 사랑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대신 분노의 신들이 지배하는 종교들이 나타나 군림하게 되었지. 그리고 물질의 소유와 축적이 성공을 결정하는 상징물이 되었어. 그렇게 사람들은 점점 영적인 삶을 잃고, 자연으로부터 멀어져 갔지. 자신에게 주어진 신의 선물에 감사하는 법을 잊어버린 거야. 어머니 대지의 은혜도 잊어버리고...
그뿐이 아니야. 서로 다른 피부를 가진 사람들끼리 갈라지고, 나라와 나라 사이도 갈라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도 갈라지고... 그렇게 서로 분열하고 대립해. 때문에 이 세계는 머지않아 멸망하게 될 거야. 지금이 바로 그 전환점이지. 곧 지축의 이동과 회전이 있을 것이고, 바다에는 큰 혜성이 떨어져 많은 사람이 죽게 되겠지. 그렇게 해서 다음 세계인 제5세계로 넘어가게 될 거야. 하지만 천만다행인 것은 그 이전의 세계들이 닫혔다가 새로 열렸던 거와 달리 완전히 닫히지 않은 채 제5세계로 넘어갈 거라고 해. 제4세계 말에 평화를 사랑하는 '무지개 사람'들이 출현했기 때문이지. 제5세계는 평화의 힘이 다시 물질의 힘을 넘어 일어나는 세계거든. 그렇게 제6세계를 지나 마지막으로 제7세계에 이르면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세상이 올 거라고 해. 모든 것이 균형과 조화를 되찾고, 사랑과 아름다움이 가득한..

우리가 한낱 무생물이라고 여겼던 돌멩이-사람의 주술사인 기육은 이렇게 자신이 태초부터 보고 들은 조상들의 이이기와 인류의 역사와 운명에 대해 트윌라 니치에게 자세히 들려 줍니다.
그의 이야기에서 주목할 것은 우리가 사는 제4세계가 인류의 영적 역사에서 전환점(tuning point)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인류는 태초에 신이 주신 사랑의 가르침을 잃어버리고 물질과 지식의 길을 걸어왔지만, 이제부터는 인류가 새로이 평화와 영성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위의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기육이 계속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re-membering, 기억의 중요성입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기억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은 제2세계라고 합니다. 제1세계가 불의 정화로 멸망하면서 태양도 비취지 않아 제2세계는 얼음으로 가득 찬 빙하의 세계가 됩니다. 자연히 사람들은 지하의 동굴에서 생활하게 되고, 추위와 싸우며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어려운 시절을 맞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살아 남기 위해서 제1세계에서 신이 인간에게 주셨던 지혜들을 회상하며, 그 기억의 조각들을 퍼즐을 맞추듯 하나하나 맞추어 나가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귀중한 가르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에 남아 있는 영적 장애들로 인해 인류는 몇 번에 걸친 시련을 맞게 되고, 그 때마다 세계는 닫고 여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고 합니다.
어쨌든 제2세계에서 re-membering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이후로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지식을 다시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과거 조상들의 삶으로부터 현재와 미래의 삶의 지혜와 가르침을 얻는 중요한 근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 하면 태초에 이 세상은 아름다움과 사랑이 가득 찬 곳이었기에... 그렇게 모든 존재가 하나가 되어 행복했기에...
그런데 그 기억은 언제나 우리 내면의 침묵과 명상으로부터만 찾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지적인 머리만으로는 그 기억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북미 인디언들이 침묵을 하며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 하면 지식이 있어도 그것을 참된 지혜와 가르침으로 이끄는 것은 결국 침묵 속에서만, 느낌과 직관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신화와 전설 등 이야기 속에는 깊은 삶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몰라서 그렇지, 아마 우리의 옛 이야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모두 다 이 세상의 삶은 나 한 개인의 삶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주 차원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한 개인의 영적인 깨어남은 곧 이 우주의 역사와 그 안에 살았고, 또 살고 있고, 앞으로 살아갈 무수한 존재들과의 영적인 만남이라는 것, 그들과 하나 됨이라는 것, 그 만남의 중심에 바로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은 정확히 re-membering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것은 다른 말로 본래의 온전한 모습,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할 때 우리에게 주셨던 그 사랑과 평화가 충만하던 시절의 참 모습을 되찾아 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생태적인 세상, 아름다운 소통 「이장」, 2005년1월호.





김형찬: 좋은글 고맙게 읽고 갑니다.^^ -[01/13-08:16]-
왕풀: 검은호수님의 글을 읽는 그 순간만은 저도 침묵과 명상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매일매일이 전날과 다름없고 그래서 늘 비슷한 일에 코를 박고 살아가다가 이런 글을 대하면 마음가짐이 달라집니다. 인류의 역사와 운명에 대한 이야기중에서 '지축의 이동과 회전'부분은 최근에 남아시아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인한 해일을 연상하게 됩니다. 책이 도착할 때마다 자판에 일일이 쳐서 이 판으로 옮기는 산풀님의 수고도 감사의 마음으로 기억합니다.-[01/17-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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