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소금쟁이
2004/11/15(월)
조회: 4662
노래와 춤 2-서정록  
북미 원주민 이야기

검은 호수 서정록

북미 대평원 인디언들의 하루는 "아침이 되었다!"고 알리는, '외치는 자'의 소리로 시작합니다. 외치는 자가 마을을 돌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웅얼웅얼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노인들이 아침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겁니다. 노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면 맨 먼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먼 옛 노래서부터 신에게 감사하는 노래 등등. 그러는 동안 마을은 분주해지기 시작하고, 늦잠 자던 아이들도 더는 꾀를 부리지 못하고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해맞이 준비를 합니다. 그러니까 인디언의 하루는 노래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패스코커디족의 전통 가수인 마가렉 폴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어딜 가든지, 또 어디에 있든지 늘 노래로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는 노래로 모임을 엽니다. 그것이 우리가 모든 모임을 시작하도 닫는 방식입니다.

미국의 민속음악 학자 나탈리에 커티스는 인디언들의 음악적 특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원시인들의 노래는 대부분 영적인 노래다. 가장 원시적인 리듬과 선율만을 갖고 있으며, 이 가운데 특히 리듬이 매우 발달해 있다. 화음은 결여되어 있다. 그런데 인디언들의 생활과 예술은 자연의 소리에 어떤 화음을 부여하고있는 것은 아닐까 할 정도로 그들이 야외에서 부르는 노래는 자연의 소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때문에 인디언들의 노래는 바람 부는 탁 트인 벌판과 드넓은 하늘 아래에서 들어보지 않으면, 자연 교향곡의 진정한 맛을 느끼기 어렵다. 게다가 어떤 문명의 음악도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음악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복잡하고 세련되며 변화가 심한 리듬을 갖고 있지 않다.

커티스의 지적처럼, 인디언 음악은 가수나 악사의 연주와 바람 소리, 물소리, 새 소리,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태풍, 하늘, 그리고 대지 등 자연이 내는 소리가 조화될 때 비로소 하나의 온전한 음악이 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서양의 음악이 평균율의 토대에서 화성과 선율을 발전시켜 온 것과 크게 대조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실내가 아닌 대지의 열린 공간에서 노래를 들으면 바람 소리, 물 소리, 새 소리 등이 자연스럽게 노래와 하나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그냥 스쳐 지나갔을 바람 소리, 물 소리, 새 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들이 그 순간 살아 있는 생명의 노래가 되는 것을 봅니다.
인디언의 노래는 우주의 노래, 생명의 노래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숨결로 부르는 그들의 노래는 그 자체가 기도이기도 합니다. 에반 티 프리처드는 『시계가 없는 나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노래는 대지를 기반으로 하는 대부분의 문화에서 기도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다.
그리고 그 기도는 대부분 가락을 동반하고 있다.
레ㄴ프족의 역사를 담고 있는 두루마기 '왈룸 올룸(Wallum Olum)'은 노래로 되어 있으며, 티베트의 사자(死者)의 서(書) '바르도'는 죽은 자를 위해 불려지는 노래다. 초기 베다의 찬가들도 특별한 가락과 장단을 지닌 노래로 불려졌다. 초기 기독교의 찬가도 단순한 가락으로 불려지다가 점차 합창곡으로 발전했다.
알곤킨 부족의 기도도 그들의 찬가와 같다. 어떤 노래는 먼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데, 이젠 그 뜻을 잘 알 수 없는 말로 된 경우가 많으며, 또 어던 노래는 신명 탐구 중에 나타나 조상이나 도움을 주는 영들에게 우리를 연결시켜 주기도 한다.

인디언들의 음악은 그 어떤 음악보다도 영적인 감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일상적 삶이 기도이듯이, 노래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소통하는 기도와 축복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바람이 부는 것도, 나무가 몸을 흔드는 것도, 물결이 넘실대는 것도, 바다가 파도치는 것도, 풀잎이 바람에 눕는 것도, 해님이 이 세상에 행복의 빛을 가득 뿌려 주는 것도, 달이 달무리를 만들며 그림자를 만드는 것도, 비가 내리는 것도, 불꽃이 너울대는 것도 모두 춤과 노래가 아닌 것이 없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무릇 생명을 가진 존재는 춤과 노래로써, 또는 말로써 그 마음과 영혼을 표현하는 법이라고. 때문에 그들의 눈에는 산도 춤추고, 바위도 춤추고, 나무 기둥도 춤추고 노래합니다. 심지어 옥수수 씨앗도 춤추고 노래하지요. 봄이 되면 어서 나를 들판에 심어 달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체로키족의 영적 교사 다이아니 야후는 말합니다. 모든 존재는 숨결을 통해서 서로 연결되고, 숨결은 우리의 신성한 마음을 다른 존재들의 가슴에 실어 나른다고.
인디언들에게 노래는 말로 하는 영적인 행위요, 춤은 몸으로 하는 영적인 행위입니다. 그런데 노래는 말을 통해서 이루어지지요. 말은 숨결을 통해서 이루어지고요. 그러므로 노래의 근원은 바로 우리의 숨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는 동안 나의 숨결은 다른 존재들의 숨결과 섞입니다. 그리고 나의 숨결에는 다른 존재들의 숨결이 들어와 있지요. 그렇게 우리는 숨쉬는 행위를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숨결은 또한 우리 생명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창조주가 흙이나 나무 등으로 만든 존재에 숨결을 불어넣어 생명을 창조했다는 이야기는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남서부의 주니족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태초에 생명을 준 것은
바람이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바람이다.
바람이 불기를 그칠 때
우리는 죽는다.

손가락 끝에서
우리는 바람의 흔적을 만난다.
그곳에서 우리는
맨처음 조상들이 창조되었을 때
불던 그 바람을 본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우리가 평소에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결에 보이지 않는 놀라운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숨결로 이루어진 말과 노래는 신성한 힘을 갖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네칠크 에스키모족의 주술사이며 시인인 오르핀칼리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노래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나의 숨결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내가 숨쉴 때와 마찬가지로 노래를 부를 때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춤을 출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인디언들은 춤을 '생명의 숨결이 가시화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몸으로 추는 춤이 신성한 행위가 될 수밖에요. 하지만 서구인들은 20세기 초까지도 춤을 통해서 다른 존재들과 영적인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춤은 한낱 축제 때 사람들과 어울리는 유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디언들에게는 파이프에 담배를 피우는 것이나 도자기에 동물과 꽃을 그려 넣는 것이나 이른 먼동의 햇살을 들이마시는 것이나 다른 사람에게 숨결을 불어넣어 축복하는 것이나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나 모두 바람 또는 생명의 숨결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이아니 야후는 말합니다. 춤과 노래야말로 숨을 온전하게 쉬는 법을 알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그녀는 또 이렇게도 말합니다. "연기조차 하늘에 올라갈 때는 나선형 춤을 춘다. 하늘과 땅,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이 만날 때면 늘 노래와 춤이 있듯이."
하지만 우리의 숨결이 언제나 노래가 되고 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관계와 기다림과 집중이 있어야 합니다. 오느핀칼리크는 노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은 조류에 몸을 맡긴 채 이곳저곳을 떠다니는 부빙(浮氷)과 같아. 그가 기쁨을 느낄 때도, 두려움을 느낄 때도, 슬픔을 느낄 때도 그의 마음은 부빙처럼 조류에 내맡겨져 있지.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때로는 그의 가슴을 헐떡거리게 하고, 때로는 그의 가슴을 고동치게 하며 홍수처럼 그를 씻어내기도 해. 그리고 서서히 물러가는 추위처럼 무언가가 그의 내면의 얼음들을 녹게 하지. 그럴 때 우리는 한없이 작아지는 것처럼 느껴.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지. 그렇지만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하고 싶은 말들은 결국 제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말아. 우리의 내면에서 떠오르는 말들이 문득 그 모습을 드러낼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노래를 얻는 거야.

이것은 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혼자 부르는 노래이거나 추는 춤일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나와 연결된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밀하게 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예술가들은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노래가 탄생한다고 말하지요. 오르핀칼리크 역시 같은 말을 합니다. 노래는 '고독할 때의 친구'라고.

노래는 사상이다. 일상적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힘에 의해서 내 마음이 움직일 때 나는 숨결로 노래를 부른다. 나의 존재 전체가 노래이며, 내가 숨을 내쉴 때 나는 노래한다.

그래서일까, 인디언들의 노래는 종종 침묵의 순간과 겹쳐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많은 경우 관객을 의식한 노래가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그것은 세상에 대한 열림, 관계, 충만함 속에서 자연스럽게 떠올려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순간, 그들의 노래는 남에게는 그저 침묵이나 혼자 흥얼거림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완전함과 신성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깊은 고독 속에서 솟아나온 이런 노래들은 매우 영적입니다. 한 마디로, 인디언 노래의 진수라고 할 수 있지요. 요즈음 우리의 노래와 춤에는 침묵이 없습니다. 내면의 고요가 없습니다. 열림이 없습니다. 관계가 없습니다. 충만함이 없습니다. 그저 시끄럽고 요란하기 일쑤이지요. 그러나 인디언들이나 제3세계 원주민들이 생각하는 노래와 춤은 다릅니다. 우리는 수많은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고, 노래와 춤은 바로 그들과 영적으로 소통하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그 과정은 때론 시끌벅적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지극히 내밀하고 고요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내적 열림과 충만함은 인디언들의 축제인 '파우와우'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축제라면 으레 떠들썩하기만 할 것 같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고요와 침묵이 있는 것입니다. 프랜 깃털과 리타 로빈슨은 파우와우 축제에서 치는 인디언 북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북의 가죽을 치는 소리는 종종 '대지의 고동 소리'로 불려진다. 그리고 그 소리는 춤추는 사람들에게 스텝을 맞출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는 북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동안 모든 자연과 고대의 것들과 조화 속에서 하나가 된다. 우리가 전통의 춤을 출 때, 우리는 위대한 전사들의 자부심과 할머니들의 온화한 아름다움과 만나게 되고, 우리의 유산은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 준다. 발을 구를 때마다 우리는 발 밑에서 어머니 대지의 배꼽을 느낀다. 어머니 대지는 힘과 용기와 원주민들의 자부심을 보내주고, 그것은 우리의 몸을 통해 흐른다. 우리는 발바닥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그것을 느낀다.
춤을 출 때 걸치는 긴 숄의 술들은 내가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이전의 세대들과 춤을 출 때 나의 가슴에서 출렁이며 나부낀다. 저도 춤을 추는 듯이, 나의 딸들은 마을 부인들의 둘레를 돌며 열정적으로 춤을 춘다. 그리고 그들의 시윽러운 젊음과 아름다움을 부인들의 노년의 지혜와 섞는다.
춤추는 동안, 나는 이 곳이야말로 내가 있어야 할 곳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 어떤 화려한 곳도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땅에서 사람들과 이렇게 어울리며 사는 삶 이외의 어떤 삶도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그렇게 창조의 움막에서 함께 만난다. 그 때 북의 고동 소리는 우리의 심장 박동 소리가 되고, 심장 박동 소리와 창조의 이야기는 하나가 된다. 젊은이들의 노랫소리는 깊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 소리, 그리고 우리에게 옥수수를 가져다 준 태양의 불꽃과 한데 섞인다. 우리는 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가를.
북의 고동 소리는 우리가 누구이며, 왜 이곳에 왔는지 말해 주는 소리다. 우리가 다시 모여 하나가 된 것을 기뻐하는 소리다. 그리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자연의 법칙에 우리가 변함없이 헌신하는 것을 축복하는 소리다.

이처럼 인디언들의 노래와 춤은 의미 없는 발산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하나하나의 행위가 이 세상의 수많은 존재들과의 만남과 교섭과 소통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인디언 사회에서는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서남부 인디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비구름은 조상들의 혼령이 자손들을 위해 가져다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죽은 뒤 비구름이 되어서 온다고 말하지요. 그리고 비구름은 바로 자손들을 위해 비를 뿌리기 위한 조상들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생전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고 춤과 노래도 부르지 않으며 외톨이로 지낸 사람들은 죽은 뒤 비구름이 되어 오지 못하고, 마른하늘에 조각구름이 되어서 온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자손들을 위해 이 세상에 돌아오긴 하지만 비를 내리는-다시 말해 축복을 내리는-먹구름은 되지 못하고, 솜털 같은 조각구름이 되어 빈 하늘을 홀로 쓸쓸하게 떠돌다 돌아간다고 말하지요.
이 이야기 뒤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춤과 노래는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먹구름과 같은 영적인 힘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세네카의 영적 교사인 한밤중의 노래 같은 이는 인디언들의 춤과 노래야말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함께 하게 해 주는 동시에 삶의 생기를 북돋워 주는 놀라운 영적인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춤과 노래야말로 생명을 가진 존재들의 모든 행위 중에서 가장 거룩하고 신성한 행위라고 말이지요.

* 생태적인 세상, 아름다운 소통 「이장」, 2004년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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