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정거장에서 기다리네

글 박원식, 사진 신준식 / 리좀 / 262쪽 / 9,000원 / 2005



“우리에겐 아직도 넉넉한 삶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살 권리가 있다”

간이역 여행과 함께 체험하는 삶의 자극과 재충전

우리는 누구나 여건과 처지에 맞추어 바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런 가운데 고달픈 일상이 연속되는 삶이란 때로 내려놓고 싶은 짐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또 하루하루 부대끼며 살아오면서 흘러간 세월이 아쉽고 덧없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요즘 세상에는 현대인의 지친 마음을 의탁하고 혼란한 머리를 재충전시켜주기 위한 각종 상품과 프로그램이 넘쳐난다. 하지만 간혹 고독, 권태, 우울, 무기력증…, 이런 단어들이 우리자신의 문제로 닥쳐오거나 탈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어디론가 훌쩍 혼자서 떠남으로써 일상으로부터 해방되고 싶기도 하다.
이 책은 혼자 열차를 타고 다니며 기차역과 주변 자연풍경, 유적과 문화를 돌아본 다음 몇 발짝 떨어져서 일상을 바라보듯 써내려간 여행 에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사라져가는 산골 간이역이 있다.

삶의 여정을 돌아보며 인생의 새로운 맛을 배우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새로이 추스를 수 있는 자극을 얻기란 쉽지 않다. 분명 세파와 일에 시달려온 보통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 템포 쉬어 갈 수 있는 여유와 휴식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고적하고 소박한 간이역이 일상의 뜨거운 열기를 가라앉히고 삶을 재충전하는 데 아주 맞춤한 장소가 될 수 있음을 직접 다녀보고 쓴 에세이를 통해 웅변하고 있다. 낯설고 사람 하나 없는 기차 정거장에서 우리는 지난 삶의 여정을 돌아보고,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소설가이기도 한 저자 박원식은 주로 산을 찾아다니면서 오지의 자연과 사람, 그 속의 삶을 재료로 하여 각종 매체에 글을 써왔다. 그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을 즐겨 찾고 글의 소재로 삼는다.
이 책에 실린 한 편 한 편의 글은 아무도 다니지 않을 법한 강가나 산골짜기 같은 오지에 수줍은 듯 숨어 있는 작은 기차역에 도착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기차가 떠난 뒤의 적막한 정경을 잠시 음미한 다음 기차역의 내력과 그 속에서 비치는 사람살이의 모습을 잔잔하고 사색적인 문체로 펼쳐간다.

‘작고 소박하고 느린’의 대명사 간이역에 바치는 헌사
미친 듯이 질주하는 각종 열차들은 좀체 간이역에서 멈추지 않는다. 간혹 멈춘다 해도 타고 내리는 승객이 점점 줄어들다 보니 역무원도 없거나 변변한 역 건물도 갖추지 못한 간이역은 작고 소박하고 느린 어떤 것을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간이역은 오랫동안 이 땅의 서민들을 이리저리 실어 나르던 달구지 같은 완행열차 정류장이었다. 하지만 완행열차는 사라지고 고속철이 달리는 시대인 지금 간이역은 점점 더 잊혀져가는 골동품이 되어버렸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대표하는 구시대의 퇴물인 것이다.
이제 그 옛날 떠남과 돌아옴, 귀향과 출향, 기다림과 헤어짐의 센터였던 간이역은 산골 사람들의 민생과 문화, 희망과 애환이 교차하는 정서적 유적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간이역에서 완행열차 시대가 남긴 가치와 매력을 찾아낸다. 그리하여 질그릇처럼 투박하고 소탈한 문장을 통해 간이역이 온몸으로 내뿜는 단순함과 평온함의 의미를 전해준다. 산천과 마을의 옛모습과 오늘날의 모습을 대비시킨다. 또 기차여행이 안겨주는 매력과 이색적인 흥취를 통해 간이역 여행을 한결 우아하고 사색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저자가 전국의 간이역을 순례하면서 써내려간 이 책은 우리네 삶에 대한 돌아봄일 뿐만 아니라 소박한 기차여행에 대한 애정이요, 간이역에 대한 헌사가 된다.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넉넉한 삶에 대한 그리움의 증표
시골 기차역은 저마다 역사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수많은 사연과 전통을 안은 채 지금도 철길 주변 마을 앞을 지키고 서 있다. 예로부터 소백산 마루를 넘어가는 죽령 고갯길의 중간 경유지였던 희방사역, 천장 달린 장의자와 팻말뿐인 양자동역, 거리는 활기차지만 역 건물은 고즈넉한 용문역, 카지노 현상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고한역, 눈꽃열차 운행으로 인한 반짝시장이 열리는 승부역, 탄광이 번성할 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통리역 들이 그렇다.

또한 저자가 순례한 간이역 중에는 시대의 변천을 따라잡지 못해 이미 문을 닫아버린 곳도 있다. 속도와 개발 지향, 도시 중심으로 재편되는 시대를 견디지 못하고 향수와 추억만 남겨둔 채로 말이다.
이렇게 시대변화 속에 마지막 호흡을 고르는 간이역을 찾아나서는 감흥과 즐거움은 일상에 파묻혀 살아가는 도시인에게 한 줄기 샘물이요, 윤활유가 될 수 있다. 우리에겐 아직도 넉넉한 삶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살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 책속으로

쓸쓸한 삶의 괘종이 댕댕 울릴 때_중앙선 용문역
여행은 때로 허무를 선물로 안겨준다. 세월의 덧없음과 세태의 얄궂음을 재우쳐 깨닫게 한다. 아울러, 내 안에 영속하는 추억의 질김과 깊음을 증거해준다. 내 마음 안에 스민 과거 유적의 영롱함과 생생함을 새삼스런 눈길로 바라보고 되새기게 만든다. 다시 말해, 여행은 풍경을 바라보는 행사가 아니다. 그것은 내 마음을 검색하고 수사하는 일일뿐이다. 내 마음속에 하나뿐인 여인숙과 다방을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확인함으로써 생의 꿈과 상상을 한결 푸르게 만드는 재생과 재활의 행장인 것이다.

시간의 범속함을 명상할 때_경북선 용궁역
오래된 간이역은 차라리 유적이다. 세월의 속임수와 세사世事의 무상을 기별하는 하나의 희귀한 전달 매체다. 과거의 유령들이 대합실 장의자에서 일어나 두런두런 옛일을 얘기한다. 흐르는 시간의 부질없음과 세태 세속의 굴곡을 묵시함으로써 삶의 범속함과 가벼움을 통기한다. 그래서, 간이역 여행은 내향적 울림을 동반한다. 간이역의 무표정 뒤에 숨은 표정을 알아차리고, 역전 거리의 지하에 수장된 시간의 유물들을 감지하는 일은 의외의 커다란 만족감을 안겨준다.

오지 않는 기차를 닮은 삶의 여정 돌아볼 때_호남선 개태사역
간이역 대합실은 이렇게 우리의 삶의 여정을 환기시킨다. 나는 대합실에 앉아 있다. 그러나 기차는 좀체 오지 않는다. 혹은 나를 외면한 채 달아나 버린다. 설령 하나의 기차를 잡아탔다 하더라도 아뿔싸, 돌아보면 다시 대합실이다. 그리고, 다시 기차를 기다리고, 기차는 당최 오지 않는다. 하여, 대합실에 웅크린 나는 둔한 머리를 쩔렁거리며 삶이란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는 일에 지나지 않음을 짐작한다. 그러니까 '기차는 7시에 떠나네'가 아니라 '기차는 당최 오지 않네'라고 노래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 흔들려 강물처럼 흐를 때_전라선 압록역
강물 풍경은 빠르게 내 안으로 굽이친다. 깊숙이 스민다. 그것이 드디어 우정을 야기한다. 말하자면 긴 여정을 거쳐 나는 지금 섬진강이라는 정든 벗과 다시 만나고 있는 셈이다. 한동안 잊은 채 지냈지만, 이제 다시 생생한 정분으로 다가오는 오랜 벗과 의미심장한 눈인사를 나누고 있는 셈이다.

오감이 열리는 고독에 잠길 때_장항선 웅천역
독산에 이른 나는 좀 너스레를 떨어대며 먼 곳의 벗에게 전화를 한다. 여기에 순결한 서해 바다가 은거해 있노라고. 인적 없는 백사장에 조수가 철벅거리고, 해변가 솔숲엔 삼월의 에테르가 진동하노라고. 해서, 행복하다고, 온몸의 오감이 열리노라고.

■ 지은이 소개
지은이: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배운 뒤 1990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모래의 섬」으로 당선했다. 이후 중편소설 「방패 뒤에서」 들을 발표했으며, 각종 매체에 르포와 여행기를 쓰는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순수한 자연의 부품으로 돌아가 나무처럼 태연하고 단순한 생을 추구하는 그의 글쓰기는 주로 오지의 사람과 자연을 재료로 삼는다.
펴낸 책으로는 『속리산(1995)』『산 깊은 강(2001)』『바닷가에 절이 있었네(2002)』 들이 있다.

사진: 신준식
산을 좋아하는 사진작가들의 모임인 <산영회>의 회원이며 월간『사람과 산』사진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리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