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12월의 책

책을 읽고 양을 잃다

쓰루가야 신이치, 최경국 옮김 / 이순 / 272쪽, 12,800원, 2010년.


 
“시를 사랑하여 오랫동안 시를 읽으면 시는 독자의 가슴속에 쌓였다가 시에 관한 온갖 이야기가 되어 밖으로 흘러나온다. 그것을 문자로 옮기면 ‘시화’(詩話)가 된다.
이 책은 굳이 말하자면, 오랫동안 읽었던 책이 흘러나온 것이니 ‘책화’(冊話)라고나 할까.
책화야말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에게 얼마나 부러운, 쓰고 싶은 책인가.”

―강명관(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오랜 세월 곱씹고 되새김질한 지식이 ‘책화’(冊話)가 되어 흘러나오다

이 책은 제48회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오랜 기간 편집자로 쌓아온 폭넓은 교양과 책을 사랑하는 고서 마니아로서의 긍지를 기품 있는 문장으로 엮은 독서 에세이다.
‘책을 읽고 양을 잃다’(讀書亡羊)는 표제는 『장자』(莊子) 「변무 제8」(騈拇 第八)에 나오는 고사에서 따온 것으로 양을 치던 장(臧)이 죽간(竹簡)을 끼고 너무나도 독서에 열중한 나머지 양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독서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지를 잘 보여준다.
책의 내용을 일별하고 평가를 내리는 일반 서평집과 달리 이 책은 오랫동안 읽어온 책이 가슴속에 쌓였다가 책에 관한 온갖 이야기가 되어 밖으로 흘러나온 ‘책화’(冊話)라고 할 수 있다. 음식을 소화시키듯이 충분한 시간을 들여 책이라고 하는 물건을 자기 안으로 동화시키고 나면 책의 내용은 독자 개개인 속에서 독자적인 변용을 이룬다. 즉 독서를 통해 흡수된 책들은 독자들의 머릿속 어딘가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세월이 가면 그 흔적들은 자연스럽게 이어져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자신을 꺼내달라고 아우성치는 이야기들이 기억술, 묵독, 근시, 책 점보기, 이명과 필명, 향기 나는 유리, 사라진 책 등의 다양한 주제로 수렴되어 이 책이 된 셈이다.
오랜 세월 곱씹고 되새김질한 지식을 착상이 빛나는 주제 아래 묶은 28개의 산문은 어느 것 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특히 도시와 작가, 책과 작가, 작가와 작가의 우연한 만남과 스침을 기록한 「만남」과 「스쳐지나가기」, 향기에 관한 자전적 체험을 예이츠의 『환상록』과 향기를 읊은 와카(和歌)로 연결시키는 「향기 나는 유리」, 한 편의 글이나 소설에서 압권(壓卷)이라고 할 만한 부분을 설명한 「세부효과」, 시각적 체험을 뛰어난 은유로 표현한 구절을 소개한 「맹인」과 같은 글은 에세이의 정수를 보여준다.
다루는 시대와 인물은 실로 광범위하다. 저자는 손때 묻은 오래된 책에서 옛사람[古人]의 흔적을 찾아 그들의 숨결을 되살려내는 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다. 특히 이 책은 에도 시대를 풍미했던 유학자·사상가·문인들의 인간적이고 소박한 풍모를 드러내면서 일본 중세 문화의 일단을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뿐 아니라 벼를 몰라보았다는 나쓰메 소세키와 소나무를 몰랐다는 미시마 유키오 등 근현대 일본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뜻밖의 면모도 소개한다. 여기에 중국의 『논어』와 당시(唐詩)는 물론이고 『요재지이』(聊齋志異) 같은 괴기담, 『유양잡조』(酉陽雜俎)처럼 일반인에게 생소한 고전,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낭만주의 시인 콜리지의 『쿠빌라이 칸』(Kubla Khan) 등 동서고금을 가로지르는 고전이 등장하니, 가히 독서 박물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편집자의 꼼꼼한 관찰력과 책에 대한 살뜰한 애정이 담긴 독서 에세이

40여 년의 독서 이력을 자랑하는 저자는 책벌레를 막는 은행잎에 대해 이야기한 다음 책장 넘기는 방법에서 동서양의 차이를 논하면서 독서의 본질에 대한 중후한 논의를 펼친다.
저자가 책이라는 사물 자체와 독서문화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가 편집자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가로쓰기 책과 세로쓰기 책의 면주(하시라)의 위치나 조판 디자인의 차이를 섬세하게 통찰하거나(「동서양 책장 넘기는 방법의 차이」), 성서나 서사시 등을 무작위로 펴서 나오는 문구로 점을 치는 성전(聖典) 혹은 개전(開典) 점보기와 일본의 노래점(「책 점보기」)처럼 책과 관련된 주술문화, 그리고 화재나 대지진으로 멸실의 위기에 처했던 책의 기구한 운명(「사라져버린 책」)을 탐색하는 바탕에는 편집자의 꼼꼼한 관찰력과 책에 대한 살뜰한 애정이 깔려 있다.
한 가지 주제 아래 적어도 서너 가지의 동서양 고전이 다루어지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풍부한 화제로 뻗어나가는 것 또한 이 책의 특징이다. 「묵독」의 경우, 묵독을 확실하게 기록한 유럽문학의 첫 작품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시작해, 고대에 행해진 묵독의 예를 찾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이어 중세 서기법의 발명과 묵독의 정착을 논한 후, 다시 대륙을 건너 고대 중국에서 행해진 묵독의 예를 『고문진보』 등에서 찾아내는 식이다. 그야말로 시공을 종횡무진 누비고, 인용은 자유자재하다.
단순한 실증이 아니라 추리를 해나가면서 판단을 내리는 저자의 명석함도 이 책을 빛나게 하는 또 다른 요소다. 우연히 발견한 1930년대의 헌 잡지에서 화적(貨狄)상이라고 불리는 신성한 목상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이 목상의 유래를 추적하는 「화적상」은 한 편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흥미를 전해준다. 또 1921년에 간행된 『모범불일?日대사전』이라는 프랑스어 사전 편찬에 관여했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기시다 구니오(岸田國土, 1890~1954)가 생전에 남긴 기록에서 오스기 사카에(大杉?, 1885~1923: 일본 다이쇼 시대의 대표적인 무정부주의자)와 관련된 기억을 역추적해서 그 오류를 밝혀내는 지점에서는 문헌학자적인 면모도 보인다.
모름지기 작가라면 하나쯤 가지게 되는 필명, 그리고 애서가라면 욕심을 내게 마련인 장서인에 대한 이야기도 빠뜨릴 수 없는 읽을거리다. 필명 몇 가지를 보자면, 에드거 앨런 포의 이름과 비슷하게 지은 에도가와 란포(江?川??), 사마천(司馬遷)에서 딴 시바 료타로(司馬遼太?), 친구의 희성을 빌린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뒈져버려라’(くたばってしまえ)는 자조 섞인 말로 만든 후타바테이 시메이(二葉亭四迷), 전화번호부를 펼쳐 연필로 찍었더니 사토미가 나와 지었다는 사토미 돈(里見?)….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처럼 생애에 걸쳐 70개 이상의 이명을 지녔던 사람도 있다. 「장서인」에서는 101명의 낙관이 소개되어 있는 『속장서인보』를 통해 다양한 종류의 낙관을 만날 수 있다. 책이 상하거나 지저분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주의할 점을 열거한 낙관, 어렵사리 모은 장서를 남에게 자랑하는 낙관, 자신이 죽은 후 장서의 운명을 유언으로 남긴 낙관 등을 통해 다양한 애서가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책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책에 대한 애정을 장서인으로 남긴 옛사람들의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게 여겨질 것이다.

독서를 통해 흔들리지 않는 옛사람의 정신을 만나다

양을 잃어버린 목동처럼 자신의 본분을 망각할 정도로 독서에 몰입한 저자가 책에서 얻는 가장 큰 즐거움은 바로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옛사람의 정신을 만나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이 책에는 당대를 대표하는 사상가, 유학자, 문인들의 인간적인 매력과 향기가 깨알같이 서술되어 있다.
에도 시대 본초학자인 오노 란잔(小野蘭山, 1729~1810)은 책과 표본으로 쌓여 있는 한 칸짜리 거실에 파묻혀서 하루 종일 독서와 저술에 몰두했는데, 자신의 집에 3년 동안 기거했던 손부(孫婦)를 몰라보았다고 한다. 메이지 시대 근대 해부학의 아버지 다구치 가즈미(田口和?)는 대학 해부실에 틀어 박혀 연구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청일전쟁이 일어난 줄 몰랐고, 천문학자 기무라 사카에(木村榮)는 러일전쟁을 몰랐다. 어쩌면 이들은 지금은 절멸의 위기에 봉착해 있는 세상을 달관한 사람들의 모습인지 모른다.
정통 유학자의 범위를 넘어서 패사 속문학에 밝았고 괴담을 즐겼던 고가 도안(古賀?庵, 1788~1847)과 스즈키 도야(鈴木桃野), 동자 귀신(갓파)과 수달 요괴를 만났지만 근시여서 알아보지 못했다는 에도 시대 말기의 의사이며 교육자인 이자와 란켄(伊?蘭軒)과 그의 아들 핫켄(柏軒)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슬며시 미소 짓게 된다.
에도 시대 유학자인 오규 소라이(荻生?徠, 1666~1728)는 다독가로 이름이 높았는데 마흔 무렵 가재를 팔아서 변통한 60냥으로 창고 가득 팔려나온 책을 사들였고 한문으로 씌어진 서적을 하루에 9센티 정도 읽었다고 한다. 다독과는 거리가 먼 인물도 있다. 송(宋)나라 재상이었던 조보(趙普)는 『논어』 한 질로 태조와 태종 두 임금을 섬겨 한 권의 책을 생애에 걸쳐 정독한 모범적인 예를 보여주었다.
그 외 놀라운 기억술 공연을 보여주었던 길거리 장사꾼인 이치류사이 류이치(一柳?柳一), 측천무후 시대의 명재상으로서 실재했던 인물 적인걸(狄仁傑, 630~700)을 주인공으로 당나라 시대의 미스터리물인 「명판관 디 공」(Detective Dee) 시리즈를 쓴 반 훌릭(Robert Hans van Gulik, 1910~1967: 네덜란드의 저명한 한학자이자 추리소설가), 고도 근시 때문에 오히려 귀가 예민해져 도시의 아침 정경을 청각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했던 고이즈미 야쿠모(小泉八雲, 1850~1904; 일본에 귀화한 영미문학자인 라프카디오 헌) 등의 인물도 만날 수 있다.

■ 차 례
1부
낙엽
동서양 책장 넘기는 방법의 차이
만남
스쳐지나가기
당나라 시대의 미스터리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초목의 이름
사라져버린 책
화적상

2부
묵독
책 점보기
세부효과
기억술
유학자와 괴담
장서인
이명과 필명

3부
향기 나는 유리
세상에 초연한 사람
근시
정독
이야기의 출처
맹인
꿈속에서 얻은 시상
언덕 위의 서양집

4부
신데렐라의 변형
잘못된 기억
나무다리의 추억

후기
평범사 라이브러리판 후기
참고문헌
해설- 책과 인간
옮긴이의 후기

쓰루가야 신이치
1946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와세다대학교 문학부 졸업. 에세이스트. 40여 년 간 책 만드는 일을 해온 베테랑 편집자이자 일본의 대표적인 독서인이다. 지은 책으로 『책을 읽고 양을 잃다』(제48회 일본에세이스트클럽상 수상), 『고양이의 눈에서 시간을 읽다』(猫の目に時間を讀む), 『고인의 풍모』(古人の風貌), 『달빛으로 책을 읽다』(月光に書を讀む)가 있다.

* yes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