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4월의 책

영국왕을 모셨지

보후밀 흐라발, 김경옥 옮김 / 문학동네 / 353쪽 / 13,000원 / 2009



‘체코 소설의 슬픈 왕’ 보후밀 흐라발이 풍자와 아이러니로 그려낸 최고의 명작!
“우리 시대 최고의 작가!” _밀란 쿤데라


보후밀 흐라발. ‘체코 소설의 슬픈 왕’. 그는 젊었을 때부터 철도원, 보험사 직원, 제철소 잡역부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마흔아홉 살 되던 해, 문득 자신이 보고 듣고 체험한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어졌다. 첫 장편소설로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과 낭만을 노래하는 어수룩한 철도원 이야기를 썼다.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국제적 명성도 얻기 시작했다. ‘프라하의 봄’이 소련군 탱크에 의해 좌절되기 전까지 첫 문학적 황금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후 공식적인 작품 활동이 금지되었다. 1989년 소련 연방이 해체될 때까지 이십여 년간, 많은 작품을 지하출판으로 펴낼 수밖에 없었다. 밀란 쿤데라 등 동료 작가들의 망명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조국을 떠나지 않았다. 저녁이면 프라하의 선술집을 자주 찾았다. 거기서 밤새도록 사회 낙오자, 주정뱅이, 가난한 예술가 등 주변부 삶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그럴수록 펜은 더욱 강해졌다. 해외 언론과 작가들은 언제부터인가 그를 ‘체코 소설의 슬픈 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슬프지 않았다. 프라하를 사랑하는 ‘체코 소설의 왕’일 뿐이었다.
체코에서는 현대 체코 문학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보후밀 흐라발의 작품을 읽어야 한다는 묵계가 있다. 그는 슈크보레츠키, 쿤데라와 더불어 체코 문학의 세 거두로 추앙받고 있는데 대부분의 문학사가들은 그중 흐라발을 가장 높이 평가한다. 하섹과 카프카의 영향을 받은 그는 그로테스크하고 우스꽝스러운 것들은 즐겨 묘사하는, 유머 감각이 넘치는 작가였다. 그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특히 『영국 왕을 모셨지』는 특유의 풍자와 해학의 맛이 가장 잘 살아난 흐라발 최고의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 왕을 모셨지』는 체구보다 큰 야망으로 시대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키 작은 호텔 웨이터의 생애를 유쾌한 문체로 그려낸 작품이다. 모든 것을 보아야 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못 본 척해야 하는 웨이터 디테의 이야기가 격동의 체코 역사와 함께 펼쳐진다.
이 작품은 1971년에 쓰였지만 작가가 출판 금지를 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지하출판으로 비밀리에 유통되다가 1980년 독일 쾰른에서 먼저 출판되었고, 체코 국내에서는 1989년에야 공식적으로 출판될 수 있었다. 그리고 2006년에 작가의 오랜 친구인 이르지 멘젤(Ji?i Menzel)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고, 영화는 체코영화제 사자상(2006년)과 베를린영화제 국제평론가상(2007년) 등 많은 상을 수상했다.

어수룩한 외모에 작은 키, 이름마저 ‘꼬마’인 호텔 웨이터 디테,
체구보다 큰 야망으로 시대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한 남자의 인생 역정!


프라하 호텔에 도착하니 사장이 내 왼쪽 귀를 잡아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넌 이곳 견습 웨이터다. 그러니 명심해라! 넌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복창한다!” 난 이곳에서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고 따라했다. 이번에 사장이 내 오른쪽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하지만 또 명심해라! 넌 모든 걸 봐야 하며 모든 걸 들어야 한다! 복창한다!” 난 얼떨떨한 채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들을 거란 말을 반복했다. 이렇게 나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7쪽)

귄터 그라스의 장편소설 『양철북』에서 성장이 멈춰버린 채로 세상을 바라보는 주인공 오스카처럼 디테 역시 청년이 되었어도 여전히 체구가 작아 꼬마라고 놀림을 받는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남들이 탄복할 만한 천부적 재능이 있었으니, 바로 돈 모으는 재주를 타고났다는 것이다. 한 백만장자의 도움으로 프라하 호텔의 웨이터가 된 디테는 그들의 여유롭고 화려한 삶에 흠뻑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제 그의 인생목표는 하나뿐이다. 백만장자가 되는 것!
명석한 두뇌와 재치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디테는 프라하 제일의 ‘호텔 파리’까지 진출하게 된다. 호텔 파리의 지배인은 손님이 들어오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메뉴를 시킬 것인지를 한눈에 알아본다. 그 모습에 주인공이 놀라워할 때마다 지배인은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난 영국 왕을 모셨지!”라고 말하며 목에 힘을 준다. 그러던 중 디테에게도 행운이 찾아와 우연히 호텔을 찾았던 에티오피아 황제를 모시게 되고 훈장까지 받는다.

이제 나는 황제에게 선택받은 존재가 되었다. 통역이 말하길 황제가 자신의 음식 시중을 나보고 맡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매번 한쪽 무릎을 꿇고 난 다음 시중을 들었고, 그런 다음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서 신경 쓰고 있다가 신호에 맞추어 잔을 채우든지 접시를 치웠다. (165쪽)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세번째 징집 명령이 떨어졌지만 체구가 왜소한 디테는 이번에도 역시 군인이 되지 못한다. 그러던 중 극장에서 우연히 만난 독일 여인 리자와 사랑에 빠진 그는 그녀를 보호하려다가 체코 애국자들의 비난을 받으며 호텔 파리에서 쫓겨난다. 머지않아 독일군이 프라하뿐 아니라 온 나라를 점령한다.
전방 간호사가 된 리자가 전쟁터에서 가져온 우표로 디테는 꿈에 그리던 백만장자가 되어 자신이 일했던 호텔을 인수하게 된다.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던 그의 행운은 전쟁이 끝나고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돌연 표정을 바꾼다. 백만장자들이 재산을 모조리 압수당하고 수용소로 보내지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아무런 소환장이 날아오지 않은 것이다. 뭔가 잘못되어 명부에서 누락된 것 같은데 자신도 백만장자이므로 수용소로 보내져야 한다며 그는 통장을 들고 국가위원회 관청에 찾아간다. 그렇게 결국 수용소로 보내지지만 그곳에서 만나게 된 호텔 사장들은 그를 아는 척도 하지 않고 경멸한다.

나는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가 가진 백만 코루나와 채석장 호텔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백만장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내 백만, 내 이백만 코루나를 인정하지 않았다. (…) 나는 전쟁으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281~282쪽)

십오 년의 허무한 감옥살이를 마치고 노인이 되어서야 디테는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는 과연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돌아볼 것인가.

“내게 불행이 닥쳤을 때, 항상 그 곁에 행운이 함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도시 프라하에서 펼쳐지는 인생희비극


체코 출신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프라하를 ‘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도시’라고 칭송한 바 있다. 잘 알려져 있듯 오늘날 프라하는 매년 1억여 명의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세계적인 관광 도시이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외국인 출입이 자유롭지 않던 공산권 국가의 수도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유사 이래 수차례 반복돼온 주변 열강들의 침입과 공격에도 결코 유머와 희망을 잃지 않았던 체코의 정신으로 오늘날 유럽의 심장으로 우뚝 선 나라, 체코. 보후밀 흐라발의 『영국 왕을 모셨지』에는 바로 그런 체코의 정신이 물씬 배어 있다. ‘내게 불행이 닥쳤을 때, 항상 그 곁에 행운이 함께 있었다!’라는 소설 속 한 문장처럼…… 이 작품은 체코의 굴곡진 근대사에 배경을 두고 있지만, 분노하거나 심각하기보다는 외려 밝고 유쾌한 웃음으로 가득하다.
‘으흠, 난 영국 왕을 모셨지’ 하고 양 어깨에 힘을 주는 호텔 파리의 지배인이 그러하듯이 누구에게나 풍족한 왕년은 있다. 짐작건대 이 작품의 제목이 상징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 자족의 의미일 것이다. 역사가 제아무리 가혹하게 개인의 삶을 지배할지라도, 결국 스스로의 삶에 대한 신념은 역사를 초월하고야 만다는 것. 당신이 한 번쯤 그 강한 신념의 표정을 보고 싶다면 인생의 희비극을 모두 끌어안은 이 남자, 『영국 왕을 모셨지』의 디테를 만나야 한다.

매혹적인 프라하를 가장 사실적으로 재현한 책!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랍게 현실 세계의 유머와 바로크풍의 상상력을 결합시킨 책! _밀란 쿤데라(소설가)

흐라발은 감칠맛 나는 유머와 고요하고 부드러운 디테일을 가진 가장 세련된 소설가이다. 우리는 흐라발을 읽어야 한다. _줄리언 반스(소설가)

이 작품은 그 일이 어땠는지에 대한 엄숙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지만, 실제 그 일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폭로하는 프리즘을 통해 그 사건의 천박함, 부조리, 잔인성을 투사한다. 믿을 수 없는 일이 현실이 된다. 몽상적인 허구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기념비적인 사료에 총체적으로 불경한 복부 타격을 가한다. _타임스

격렬했던 20세기 체코의 정치, 사회 상황에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욕망, 진실과 허위가 서로 부딪치는 모습 속에 그 시대를 살았던 작가의 사색과 고민이 묻어나는 작품이며, 그런 모습을 통해 작가는 독자들에게 '삶의 의미'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_「옮긴이의 말」에서


지은이 보후밀 흐라발
1914년 체코의 브르노에서 태어나 프라하 카렐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젊은 시절, 시를 쓰기도 했으나 독일군에 의해 대학이 폐쇄되자 학교를 떠나 철도원, 보험사 직원, 제철소 잡역부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그러한 경험은 훗날 매우 사실적이면서 구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마흔아홉 살이 되던 해, 뒤늦게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첫 소설집 『바닥의 작은 진주』(1963)를 출간하며 작가로 데뷔, 이듬해 발표한 첫 장편소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1964)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프라하의 봄’ 이후 1989년까지 정부의 검열과 감시로 자신의 많은 작품이 이십여 년간 출판 금지되었음에도 조국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해외 언론과 작가들로부터 ‘체코 소설의 슬픈 왕’으로 불리는 한편, 지하출판을 통한 작품 활동으로 사회 낙오자, 주정뱅이, 가난한 예술가 등 주변부의 삶을 그려냄으로써 체코의 국민작가로 각광받았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현대작가’로 평가받는 흐라발의 작품들은 체코에서 무려 삼백만 부나 팔렸고 전 세계 27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또 여덟 편의 작품이 영화화되었는데 그중 이르지 멘델이 감독한 두 편의 영화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와 <영국 왕을 모셨지>는 각각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 부문(1967)과 체코영화제 사자상(2006), 베를린영화제 국제평론가상(2007)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체코를 방문한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작가가 자주 찾던 선술집을 찾을 정도로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은 흐라발은, 1997년 자신의 소설 속 한 장면처럼 프라하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려다가 5층 창문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주요 작품으로 『너무 시끄러운 고독』(1976) 『시간이 멈춘 작은 마을』(1973) 등이 있다.

옮긴이 김경옥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빈 대학 체코어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외대에서 체코?슬로바키아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옮긴 책으로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남자 없이 살아야 할 101가지 이유』 『아이와 비』가 있다.

* 인터넷 교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