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3월의 책

풀이 있는 여름별장

헤르만 코흐 /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432쪽 / 14,000원 / 2015년.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
- 선(善)으로 치장한 우리 내면의 악(惡)을 마주하다

코흐의 작품은 하나같이 악의 특수성과 보편성의 양면을 다룬다. 그의 소설에는 특별히 병리적이라 할 정도로 악한 개인이 등장한다. 그들은 도덕적 양심이 결여되어 있으며, 분노를 제어하는 방법을 모르고, 자기 존재에 대한 특권의식으로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현저하게 결핍되어 있다. 이런 인간에게 악은 유전자적 이상과 같은 것으로, 유년 시절부터 발현되어 고칠 수 없는 천성의 일부로 따라다닌다. 독자는 먼저 우리 사회의 일면에 독버섯처럼 이런 악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게 된다. 하지만 코흐는 더 큰 충격을 준비하고 있는데, 악행은 오로지 특이한 개인만이 저지르는 게 아니며 일상적으로 행해진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가정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식에게 해를 가한 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부모는 어느 선까지 행동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선뜻 대답을 내어놓지 못할 만큼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게 만든다. 결국, 평범한 인간이 양심의 가책 없이 악을 옹호하는 상황을 보면서 독자는 자신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악의 본성을 직시하게 된다.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악(惡)을 부모애라는 선(善)으로 치장하는 인물을 거울삼아 자신을 비춰보며 섬뜩한 내면을 직면하는 것이 그의 소설이 주는 심리적 환기 효과이다. 이렇듯 코흐의 소설은 독자가 인물에게 이입하도록 요구한다기보다, 동감할 수 있을지 자문하도록 유도하는 세련된 방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소설을 읽는 내내 독자들은 왠지 소화불량에 걸린 듯 불편하고 껄끄러운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삶이 완전히 달라져서……” 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귀한 사람이나 물건을 잃은 사람들. 어느 누구도 겪지 말아야 할 일,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일을 겪은 사람들. 그래도 나는 항상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가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그런 일을 직접 경험한 뒤에야 그 말이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때는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말보다 더 좋은 표현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더 무거워진다. 특히 시간이 그렇다. 시간이 변한 것 같다. 시간이 정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느려진 것을 부인할 수 없다…(중략)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를 때는 훨씬 더 느려진다. 우리는 대기실에 앉아 시계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 건지 알 수 없다. 그 대기실과 이어진 의사의 진료실이나 정부기관은 십중팔구 이미 오래 전에 문을 닫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문에서 우리를 깨워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우리에게 다가와 이제 집에 가도 좋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 294쪽

보통 스릴러에서 독자들이 기대할 수 있는 긴장감과는 다른, 작가 특유의 섬뜩함이 전작에서와 동일하게 이 소설에서도 느껴진다. 작가는 별 다를 것 없는 일상을 얘기하듯 주인공의 일상과 내면 심리를 담담히 묘사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독자들은 점차 주인공에게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야기는 지루한 듯 전개되다가 곧바로 등장인물들이 서로 뒤엉키면서 독자들이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드는 활력을 갖게 된다. 타인에 대한 끌림, 반감, 걱정, 신뢰, 그리고 불신이 아주 멋지게 드러나며, 중반부를 넘어서는 순간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폭발한다.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기도 하고, 뭔지 모를 거북함을 느끼기도 하고, 호기심 넘치는 의문을 갖게 될 수도 있다. 어떤 것들은 이해되지만, 또 어떤 것들은 이해할 수 없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이야기에 신빙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요소이다.

“지나치게 어두워서 우스꽝스러운”
- 긴장감의 암류(暗流) 속에 숨은 날카로운 유머와 풍자

이미 여러 인터뷰에서 그가 밝혔듯이 그의 소설은 단지 어둡고 섬뜩한 인간의 내면을 들추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범행과 음모를 따라 진행되는 사건의 구성은 스릴러의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적지 않은 스릴러 소설들이 반전에만 집착하는 것과는 달리 그의 소설에서는 진상이 밝혀지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독자를 두뇌 게임이라는 오락적 요소로 매혹하기보다는 벌어지는 사건의 긴박감만으로도 소설을 충분히 흥미롭게 만들 수 있다는 작가적 자신감이 돋보인다. 이번 소설에서도 추리적 요소는 있지만, 작가는 그 어떤 장르적 분과에도 딱히 집착하지 않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펼쳐나간다.
이런 면에서 헤르만 코흐는 현대 소설의 전범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가이다. 멀티미디어와 경쟁해야 책이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 독서의 재미라는 본령을 따르면서도 문학이 지향해야 할 핵심적 주제를 놓치지 않는다. 다양한 가치의 세계에서 선과 악의 모호한 구분을 묘사하면서도 윤리관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회적 잣대로 인물의 행동을 쉽게 재단하지 않으면서도, 우유부단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의 소설에는 작가 스스로 인정했듯이 사회적 ‘블랙 코미디’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비판에는 풍자가 숨어 있고, 끔찍한 사건이 해프닝으로 변모하며, 인물의 위선은 개그에 가까울 정도로 노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독자는 그의 소설에서 웃음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섬뜩한 현실에서 유머를 발견한다. 인간의 본성은 가끔 지나치게 어두워서 우스꽝스러운 것이라고 헤르만 코흐는 말하는 듯하다.

“나는 내 소설이 그저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모든 이를 존중하고 이해한다. 하지만 그들이 뭔가 본질적인 것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코미디이다. 이 소설들은 보기보다는 그다지 ‘어둡지’ 않고, 적어도 그런 식으로 의도하지도 않았다. 나 자신은 내 인물들과 거리를 두지 않고 있다. 실제로 나는 동정이 없는 인물들을 좋아한다. 그들에 대해 쓰는 게 재미있고, 그들이 이야기의 서술자일 때 특히 더 그러하다. 이따금 그들이 우리가 동일시할 수 있는 말이나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전체 인격과는 동일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나는 인간혐오자가 아니고, 낙관주의자이다. 《디너》와 《풀이 있는 여름별장》에서도 이러한 낙관주의를 찾고자 하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작가 인터뷰 중에서 소설의 결말 직전에 나오는 장면은 갑작스럽게 또 다른 의문을 갖게 만든다. 해결의 가능성이 바로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또 어떤 반전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독자로 하여금 초조하게 만든다. 아니면 그저 상관없이 지나쳐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은 무엇보다도 희망과 구원을 예감하게 한다. 허공을 향해 기운차게 뛰어오르는 아이의 모습에서 우리는 순간적으로 그 빛을 엿볼 수 있을지 모른다.

저자 : 헤르만 코흐
1953년 출생. 칼럼니스트, 희곡작가, TV 프로그램 제작자인 동시에 출간하는 모든 작품마다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큼 네덜란드에서 사랑받는 국민작가이다. 특히 2009년 출간한 《디너(Het diner)》는 네덜란드에서만 42만 부 이상 판매되며 장기간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고, 그해 동안 유럽 전역에서 백만 부 이상 판매되면서 ‘전 유럽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7위’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다수의 문학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면서 독자들이 뽑은 올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세계 37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어 독자와 언론으로부터 뜨거운 호평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를 포함해 세계 각국에서 연극과 영화로도 제작되어 이탈리아에서 영화화된 [더 디너]는 2014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4관왕을 수상하였고, 배우 케이트 블란쳇의 첫 감독 데뷔작으로 기대를 모으며 미국에서도 영화화를 진행하고 있다. 2011년 출간한 《풀이 있는 여름별장(Zomerhuis met zwembad)》도 “히치콕의 필름을 연상시킬 만큼 놀랍고, 긴장감 넘치며, 유쾌하고, 현실적”이라는 언론의 찬사를 받으며 네덜란드에서만 37만 부가 팔렸고, 27개국에 번역 판권이 수출되었다.

역자 : 김승욱
성균관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뉴욕 시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여성학 과정을 수료했다.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로 근무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우아한 연인》, 《스토너》, 《분노의 포도》, 《도플갱어》,《블러드 워크》, 《블랙 에코》, 《신 없는 사회》, 《영원한 어린아이 인간》,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 등이 있다.

* 예스24에서.